[다산칼럼] 균형감각 부족한 사회..朴孝鍾 <서울대 교수·정치학>

사람은 두발로 서고 새는 양 날개로 난다. 이것은 균형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현상이다. 균형을 잃으면 사람은 넘어지고 새도 떨어진다. 선과 악을 저울질하는 정의의 여신도 균형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균형(equilibrium)이란 어원적으로 천칭(天秤:librum)이 같아질(equi) 경우다. 노무현 대통령이 쓴 다음부터 '긴장관계'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균형감이란 긴장감보다 중요하다. 운전자도 운전을 하면서 계속해서 긴장만 할 수는 없다. 긴장은 때때로 풀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균형은 언제나 안정성의 필요조건이다. 막상 균형감각이 부족한 것이 우리사회다. 사물의 양면을 보지 않고 한면만 보려는 경향이 강한 까닭이다. 정부관계자들은 유권자에 의한 선택은 중시하고,소비자에 의한 선택은 경시한다. 정부의 통제는 확실한 반면,시장의 통제는 불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유권자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면 정당성이 있고,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뽑힌 것에는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새 정부가 출범한 것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한 기업이 오랫동안 시장에서 살아남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치부한다. 소비자의 선택보다는 편법과 지대추구행위에 의해서 살아남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균형을 잃은 판단은 아닐까. 신문이 정부를 시샘·박해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부가 신문을 시샘·박해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면,코드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정치를 하자고 하면서 코드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긴장관계를 유지하자고 한다면,균형잡힌 시각이 아니다. 정부가 말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긴장관계는 삼권분립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입법부와 사법부,행정부와 사법부가 상호간에 건전한 긴장관계를 맺어야하기 때문인데,이것이 바로 견제와 균형의 정신이다. 따라서 긴장관계의 대상이 정부부처보다 시민사회가 된다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시민단체도 균형감각이 부족하다. 이라크전 파병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에 대해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공언한 시민단체의 소신있는 반전정신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막상 파병을 주도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서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반전'에 대해서는 열심이면서 '반핵'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도 균형을 잃은 처사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북한과 이라크 주민들의 비인간적 삶을 신랄하게 성토하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편 전교조가 교사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안간 힘을 쏟는 것은 당연하나,교장과 교감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권위주의'로 몰아붙이는 것도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다. 여교사가 차를 날랐다는 사실만으로 차배달 강요와 굴종으로 치부하는 분위기도 균형과 맞지 않는 처사다. 인터넷 참여도 마찬가지다. 컴맹은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온라인에서 욕설로 일관하는 '욕티즌'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태도,자기자신의 주장은 경청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언어폭력으로 크게 상심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버릴만큼 절박한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균형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불황의 한파가 몰아쳐 분기별 무역수지도 적자로 돌아서고,외국인 투자마저 크게 감소하는 위기상황인데도 출자총액제한의 예외를 줄이는 등 기업규제를 강화하고 있다면,경제부처도 균형을 상실한 것이다. 시장을 존중하겠다고 하면서 시장의 자율적인 감시기능은 믿지 못하고 정부의 직접규제 정당성만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잃어버린 균형을 찾아야 한다. '긴장관계' 못지않게 '돈독한 관계'도 말하고,'참여'만 말할 것이 아니라 '책임'도 같이 말해야 한다. 시장개혁과 관련해서도 '규제'만 말할 것이 아니라,'자율'도 강조해야 한다. '전쟁반대'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북핵반대'도 소리를 높여야 한다. 균형이란 크게 부담스러운 개념은 아니다. 밤과 낮,남자와 여자,해와 달처럼 자연스러운 개념이다. 오히려 불균형으로 쏠릴 때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고 해야 한다. 우리가 균형잡힌 사회로 나아갈 때 비로소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한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