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구 파리특파원의 '명품이야기'] 샤를 주르당 & 찰스 주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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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쪽 소도시 로망에 '아브뉘 샤를 주르당(Avenue Charles Jourdan)'이란 거리가 있다.
샤를 주르당은 한국에서 '찰스 주르당'으로 알려진 브랜드의 프랑스어식 발음이다.
로망에는 또 20세기 구두 패션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찰스 주르당 구두박물관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찰스 주르당이 살던 집과 아틀리에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오늘날 세계 1백여개 매장을 갖춘 세계적 명품 브랜드로 성장한 찰스 주르당이 처음 설립된 곳이다.
본사도 로망에 있다.
1986년 로망시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에 찰스 주르당의 이름을 붙였다.
로망 전체가 마치 찰스 주르당 타운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찰스 주르당에 대한 경의가 이 지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는 세계 패션사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긴 드레스 속에 감추진 가죽 오브제에 불과했던 구두가 중요한 패션 소품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찰스 주르당은 낮은 굽의 구두가 주를 이루던 당시 '루이 15세' 또는 '샤를 9세' 스타일을 다양한 색의 하이힐로 선보였다.
재료도 가죽 일변도에서 벗어나 빌로드와 실크 등을 사용했으며 모피 진주 금속을 매듭과 자수로 응용해 의상과 구두의 조화라는 새로운 패션 코디네이션의 장을 열었다.
샤를 주르당이 찰스 주르당이란 영어식 이름으로 더욱 알려진 것은 미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결과다.
찰스 주르당은 1950년 아들 롤랑을 뉴욕에 보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지사를 개설했다.
당시로선 대단한 일이었다.
그에 앞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샤넬조차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패션업체가 유럽과 미국에 동시에 매장을 갖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찰스 주르당은 이미 50년대에 유럽 여러 도시와 뉴욕에 판매지사를 구축했다.
가족기업으로 출발한 찰스 주르당은 1970년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경영권은 창업자의 막내아들인 롤랑이 맡았다.
그는 해외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자금이 필요하다고 판단,미국 제네스코를 최대주주로 받아들였다.
찰스 주르당이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잡은 데는 미국의 자본과 마케팅 기법이 크게 기여했다.
1981년 롤랑 주르당 회장이 은퇴하며 스위스의 명품 그룹 PWC가 찰스 주르당을 인수했으며 가족경영은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찰스 주르당의 얼이 끊긴 것은 아니다.
1921년 회사 설립 당시의 정신과 전통은 그대로 살아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소유권은 스위스로 넘어갔지만 '프렌치 터치'의 대표적 브랜드로 꼽힌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수없이 배출한 최대 명품산업국가 프랑스에서 디자이너 이름이 도로명으로 사용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질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브랜드명이 거리 이름으로 명명된 것은 찰스 주르당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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