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의원들 옷 보면 숨막힌다..金容旻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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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성당에 가면 드는 생각이다.
신부님이 성찬 의식을 집행하며 성체를 상징하는 빵을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신부님이 우선 빵과 포도주를 드신 다음,수녀님이나 봉사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준다.
그 다음에 일반 신도들이 줄을 맞춰 나가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
독일 유학시절에 다니던 학생성당에서는 이 순서가 달랐다.
독일 신부는 장애인에게 제일 먼저 주고,다음에 일반신도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자신은 맨 나중에 먹었다.
이런 신선한 충격은 아이를 데리고 간 소아과 의원에서도 다른 형태로 반복되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안내되어 간 진료실에는 의사가 없었다.
거기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옆방에서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왔다.
알고 보니 옆방도 진료실이었다.
그러니까 이 자그마한 동네 소아과의원은 진료실이 여러개로서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면 의사가 이방 저방으로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동네 병원의 진료실 풍경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나라 병원의 진료실에 들어가면 우선 의사들이 앉아 있는 커다란 의자와 그 앞에 놓여 있는 환자용 초라한 둥글 의자가 대조적이다.
거기 앉으면 괜히 주눅이 든다.
이 두 풍경은 우리 사회 권위주의의 흔적을 보여준다.
독일이라 해서 처음부터 신도나 환자를 먼저 위하는 제도가 있었겠는가.
중세에 지어진 성당에 가보면 제단은 높기만 하고,설교대는 기둥 위 높은 곳에 설치해 놓아 그 권위를 짐작케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위세를 떨치던 이런 권위주의는 68학생운동을 전환점으로 많이 희석되었다.
국가와 아버지의 경직된 권위를 문제삼고 이에 저항한 학생운동의 노력 덕분에 독일 사회는 많은 분야에서 자유로워졌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85년 헤센 주정부의 장관 선서식에 녹색당 몫의 환경·에너지부 장관이 된 요시카 피셔(현재의 독일 외무장관)가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등장한 사건이다.
장관이 선서식에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나타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제 독일 연방의회에서는 자유로운 옷차림의 의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에 비하면 우리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이다.
짙은 색 양복에 넥타이 매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가 우리 국회의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여기에 과천 청사 공무원들,대기업 회사원들의 단정한 모습까지 합하면 숨이 막힌다.
대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보직교수들의 모습은 기업 임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가장 자유로워야 할 대학이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로 뭉쳐 있다.
위에서 결정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고,한번 계획한 것은 변경할 수 없다는 사고가 대학을 사회보다 더 경직된 곳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권위주의가 조금씩 탈색되어가는 조짐이 보인다.
대학 강의실에서 교단이 사라진 것이 그 한 예이다.
칠판 밑에 있던 한치 높이의 나무 교단은 키가 작은 선생도 학생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교단이 사라지면서 학생들과의 눈높이가 같아졌고,따라서 관계도 조금 더 가까워졌다.
캐주얼 차림으로 일하는 회사도 많이 늘었고,환경부에선가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일하는 것을 장관이 권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공사중이던 북한산 관통도로 건설계획을 정부가 스스로 재검토하는 일도 벌어졌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성체를 어떤 순서로 나누어주건,국회의원이 어떤 옷차림을 하건 그 자체만으로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작은 변화는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는 한 이루어지기 어렵기에 의미를 지닌다.
봉사한다는 생각,고객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생각,상대의 마음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야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이 변화가 일상적이 될 때 세상이 새로워진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에는 일사불란한 위계질서보다 자유분방한 수평적 질서가 더욱 생산적이다.
선생과 학생,상사와 부하,대통령과 국민,남편과 아내 사이에 드리워져 있던 권위주의가 사라지고,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운 21세기 사회를 맞을 것이다.
kimym@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