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성장, 量보다 質 높일때..오이겐 뢰플러 <알리안츠투신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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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겐 뢰플러
한국은 2002년에 6.3%의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을 기록했다.
전 세계적으로 만연했던 경제 불황을 감안한다면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놀랍기까지 한 수치다.
이 같은 GDP 성장은 국내의 활발한 수요로 이루어졌고,국내수요는 가계부채의 급격한 증가로 뒷받침됐다.
가계부채는 2001년 3백42조원에서 2002년 말 4백39조원으로 28% 증가했다.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한국 성인인구의 14%가 빚을 갚을 수 없게 됐고,신용카드사 연체율은 미국 카드사의 몇배가 됐다.
그리고 한시적으로는 카드사들이 자금시장으로부터 자금을 보충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됐다.
분명한 것은,소비자와 카드사들이 한동안 '높은 GDP 성장률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소비심리는 침체돼 있고,소매 또한 두달 연속 감소한 상태다.
2003년 경제전망은 더 이상 낙관적이지 않다.
물론 필요하다면,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경제정책을 활성화시켜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자재정은 정부부채를 가중시키고,이는 세금 증가로 이어질 것이며,이로 인해 미래의 경제성장이 제한되고,납세자 부담이 높아지는 등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르게 될 것이다.
무리한 고성장은 공공복지를 향상시키기 보다 정부 개입을 늘리는 등 악순환을 초래한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전,한국은 매년 증가하는 투자지출에 의존해 높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기업들의 차입경영을 부채질해 일부 재벌의 도산으로 이어졌고,한국경제 전체를 위기로 몰아 갔다.
그 이후 기업 부채는 많이 감소했지만,여전히 한국의 경제성장은 채무 증가분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엔 가계부문의 부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것이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다.
현재 한국경제의 총부채는 외환위기 이전보다 더 많다.
한국은 선진국보다 부채 의존도가 낮은 정부부문의 부채를 증가시킴으로써 향후 수년간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기업,가계와 정부,모든 부문에서 조정의 여력을 잃게 될 것이다.
더욱이 과도한 부채는 리스크와 변동성을 증가시킨다.
자본시장은 변동성을 선호하지 않아 그에 대한 대가,즉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한국 증시는 다른 나라들보다 현저히 저평가돼 있다.
이른바 Korea Discount는 한국경제가 갖고 있는,상대적으로 높은 리스크에 의해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GDP의 변동폭은 한국 증시의 변동폭과 병행한다.
지난 10년 간의 GDP 성장률 변동폭은 미국이 3%인데 반해 한국은 10%였다.
10년간의 증시 변동폭은 미국이 16%인 반면 한국은 무려 37%나 됐다.
이러한 높은 리스크로 인해,현재 S&P 500의 PER가 17인 반면 KOSPI의 PER는 6.5에 불과하다.
Korea Discount의 또 다른 요인은 한국기업의 회계수준과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신 때문이다.
높은 성장률과 기업지배구조 간에 관계가 있음직해 보이는 것은 비단 한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최근 전 세계에 경종을 울린 기업지배구조 스캔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건들은 기업수익 성장률의 일정 부분은 적어도 지속 가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의도적으로 성장을 유도하는 것은 흔히 리스크와 변동성을 증폭시킨다.
정부와 기업은 오히려 성장의 '질'(지속성장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고성장정책은 경기 과열과 침체를 초래하고,시장이 자생력을 상실해 결국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야기시킨다.
정부 간섭은 자유시장을 저해하거나 파괴할 수도 있고,도덕적 해이를 가져오며,국가의 장기적 성장과 복지를 해칠 것이다.
정부는 직접적으로 성장을 지원하기 보다 자유시장 시스템의 활성화를 위해 건실한 인프라와 효율적인 기관 구조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또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힘써야 한다.
대구지하철 참사뿐만 아니라 서울의 환경오염도가 세계 상위권인 것은,성장을 위해 삶의 질과 안전을 희생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국은 분명히 개발도상국 단계를 지났다.
이제 초점은 발전의 양(量)이 아니라 발전의 질(質)로 전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