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번뇌에서 벗어나는 법 .. 洪起三 <동국대학교 총장>
입력
수정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하기 위한 제등행렬이 지난 4일 장엄하게 이루어졌다.
서울 한복판을 흐르던 '연등의 강물'이, 손에 손에 들린 형형색색의 봉축등이 유난히 소담스럽고 곱게 느껴졌다.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 태어나자마자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오직 내게 존귀하나니, 이 세상 모든 고통을 내가 평안케 하리라'고 사자후하신 탄생게(誕生偈)에 잘 나타나 있다.
한마디로 부처님은 고통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고통에 대한 석가세존의 인식은 참으로 철저했다.
그것은 갠지스강가에서 제자들에게 설한 "그대들이 그동안 생사에 유전(流轉)하면서 고통과 슬픔으로 흘린 눈물은 저 갠지스강의 물보다도 많으니라"고 한 가르침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깨우쳐주는 다음의 '우물가 등나무(井藤)' 비유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아주 먼 옛날, 한 나그네가 광야를 거닐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나운 코끼리가 나타나 그를 공격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마른 우물 속에 들어가 피하고자 하였다.
우물곁의 큰 등나무 뿌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데 바닥을 보니 독룡(毒龍)이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라 나무 뿌리에 매달려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에서 네마리의 독사가 혀를 날름대며 노려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가 이번에는 위를 쳐다보니 자기가 매달려 있는 나무 뿌리를 흰쥐와 검은쥐가 갉아먹고, 코끼리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벌판을 휩쓰는 맹렬한 들불은 등나무를 태우기 시작하고,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쏟아져 내려와 그의 온 몸을 쏘아댔다.
그런데 그때 위에서 뭔가가 떨어져 그의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맛을 보니 달콤한 꿀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극한 상황도 잊은 채 다섯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꿀을 받아먹는데 정신을 팔고 있었다.
이 비유는 '본연부(本緣部)'의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말하는 광야는 생사윤회의 무명(無明)의 길고 어두운 밤을, 한 나그네는 어리석은 중생을, 코끼리는 무상(無常)의 이법(理法)을 의미한다.
또 우물은 생사를, 나무뿌리는 사람의 수명을, 독룡은 죽음을, 네마리의 독사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땅 물 불 바람(四大)을 상징한다.
그리고 흰쥐와 검은쥐는 낮과 밤을, 들불은 늙음과 질병을, 벌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다섯방울의 꿀은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의 오욕락(五慾樂)을 각각 뜻한다.
범부중생의 고통과 미망(迷妄)을 묘사하고 있는 이 비유는 인간의 존재와 삶을 돌아보게 하는 법문(法問)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실존적 한계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 우리의 마음은 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오염되어 고요와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 고통과 번뇌, 시기와 질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고통과 어둠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테러와 전쟁의 공포는 더해가고 있으며, 욕망에 바탕한 물질문명의 산물인 환경파괴는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다.
불교경전에서는 이러한 고통과 어둠을 흔히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라고 지칭하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운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성취한 후 "나는 영원한 생명(不死)을 얻었노라, 나는 모든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났노라"며 희망의 대선언을 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緣起:모든 현상이 생기(生起) 소멸하는 법칙)의 진리'는, 인류의 고통이 절대자의 뜻에 의한 것도, 숙명적인 것도,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무지와 탐욕에 의한 것임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그리하여 그 무지와 탐욕에서 벗어난 영원한 자유와 평화, 다시 말해 해탈과 열반의 정토를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컨대 부처님은 '고통과 절망의 어두운 사바세계에 안락과 희망의 정토를 이루기 위해' 어둠속에서 빛나는 저 연등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