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대선자금 공개제의 파장] "정치인 만나도 명함 안줍니다"

"정치인을 만나도 명함은 건네지 않습니다." 국내 재벌그룹 계열사 사장 A씨의 얘기다. 선거철이나 후원회를 앞두고 혹시 곤란한 '부탁'을 받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후원 요청을 받을 경우 내지 않기도 부담스럽고 내더라도 적정 금액을 뽑아내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A씨도 "정치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수는 없다"고 토로하면서 "문제는 돈을 전달하는 절차와 금액"이라고 말했다. 사실 웬만한 국내 기업들중 정치자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는게 정설이다. 특히 재벌그룹이나 중소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오너'들 입장에선 집권당이나 이른바 권력실세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줄을 대려 했던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과거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엔 기업인들이 줄줄이 청와대로 불려가 수백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일도 있었다. 최근 이같은 정치자금 제공 관행은 상당 부분 양성화ㆍ공식화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법정한도를 넘어선 음성적인 거래는 여전하다는 것이 재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얼마 전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됐을 때 '지난 대선에서 여당이 요구한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아 괘씸죄에 걸렸다'는 루머까지 나돌 정도로 정치자금을 둘러싼 기업들의 반응은 예민한 실정이다. 현실적으로도 연간 2억5천만원으로 정해진 현행 정치자금법상 '법인의 연간 후원금 기탁한도'로는 폭주하는 정치자금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한다. 기업주가 개인 자격으로 정당이나 국회의원 후원자금을 내도 한도는 연간 1억2천만원에 불과(?)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몇년 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정치인도 아닌 전직 대통령 아들에게 5억원을 전달했다가 지난해 수사를 받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또 일부 기업은 직접적인 자금제공 대신 관련 계열사를 동원하거나 유력 정치인의 측근 인사들에 대한 우회 지원을 통해 '인사치레'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