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경기진단] (3ㆍ끝) '풀린 돈은 어디로…'

"벌이요? 말도 마십쇼. IMF 때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택시기사 11년만에 이런 불경기는 처음입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방화동으로 가는 택시안. 택시기사 박기성씨(46)는 나름대로 경기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는다. "택시에는 공차율(빈차로 운행하는 시간 비율)이란게 있다. 작년말 만해도 공차율이 20%가 안됐는데 지금은 35%를 넘는다. 10시간 일하면 3시간30분은 빈차로 돌아 다닌다는 얘기다. 솔직히 '입금' 맞추기도 힘들다. 예나 지금이나 돈은 택시기사를 거쳐 돈다고 하는데 우리가 돈을 만지지 못하는 걸 보면 돈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돌지 않는게 분명하다."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다. 돈이 엄청나게 풀렸다는데 정작 개인들은 돈이 없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돈이 없으니 쓰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개인들이 돈을 써야 사는 내수경기는 죽을 쓰고 있다. 지난 1일 저녁 8시. 서울 삼성동 도심공항터미널 뒤편 홍어회 전문점 '산수유'. 손님이 가장 많다는 금요일인데도 빈 자리가 많다. 가게 종업원은 "주메뉴인 5만원대의 홍어회나 삼합회는 가격이 부담스러운지 찾는 손님이 별로 없다"고 전했다. 비슷한 시간, 길건너 한국전력 본사 뒤편 설렁탕집 '이남장'은 손님들이 서서 기다릴 정도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은 6천원. 직장인 김한정씨(31)는 "작년만 해도 '1차는 등심, 2차는 맥주, 3차는 선택'이었는데 요즘엔 설렁탕에다 수육 한 접시로 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압구정동에서 점심 메뉴로 한식 뷔페를 팔던 두 음식점은 불경기 탓에 운명이 엇갈렸다. 1만5천원짜리 뷔페를 팔던 '경복궁'은 손님이 줄어 최근 문을 닫았다. 반면 5천원짜리를 파는 '오비게이트'는 몰려드는 손님으로 즐거운 비명이다. 밤에는 호프집으로 바뀌는 '오비게이트'는 요즘 점심 매출이 저녁 매출에 육박할 정도. 1만원이 넘는 음식점은 죽을 쑤는 반면 그 미만인 음식점은 손님으로 미어지는 풍경. 소비를 주도하는 중산층이 그만큼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는 얘기다. 비단 중산층만이 아니다. 일부 고소득층의 경우에도 '안쓴다'는 대열에 합류하기는 마찬가지다. 경기도 일산의 병ㆍ의원에 각종 소모품을 공급하는 고양의료기 김익주 사장(41)도 외환위기 때보다 체감경기가 더 나쁘다는 데 동의한다. "올들어 당장 병원을 찾지 않아도 되는 성형외과와 치과에 대한 소모품 납품이 절반가량 줄었다"는 것이다. 중산층과 일부 고소득층이 이럴진대 저소득층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자식과 동반자살이 급증하는 것은 이런 불황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작년에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자살한 사람은 1만3천55명. 하루평균 36명꼴이다. 그렇다고 개인 소비가 모든 면에서 위축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일부 계층의 씀씀이는 불황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지난 상반기 유학·연수비로 해외에 나가 쓴 돈은 사상최대인 8억2천90만달러(약 9천7백억원). 여름방학을 맞아 웬만한 가정이면 초등학생 1인당 4백만∼5백만원짜리 어학연수를 미국 호주 등지로 보내고 있다. 유학ㆍ연수비를 포함한 여행수지 적자는 14억6백70만달러로 역시 사상 최대(반기 기준)이다. 해외 골프여행은 한술 더 떠 상반기중 골프관광을 다녀온 사람이 5만3천87명으로 전년동기대비 22.5% 늘었다. 역시 사상 최대다. 문제는 해외에선 펑펑써도 국내에선 돈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기불황 속에서도 일부 대기업들은 수출호조 덕에 호황을 누리며 직원들에게 1인당 수백만원씩 성과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가능한 한 '돈을 안쓰고 보자'는데 동의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 "재작년 대출을 받아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다 날려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힐 뻔 했다. 어떻게 함부로 돈을 쓰겠는가?(A기업 정 모 차장)" "사실 정치 경제 등 모든 것이 불투명한 것 아니냐? 기업들도 투자를 유보하는 마당인데 개인이 어찌 흥청망청 돈을 쓸 수 있겠는가?(김 모 신경외과 의사)" 결국 '아랫목의 온기'를 '냉랭한 윗목'으로 전파하려면 개인들의 소비심리를 북돋우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3백23만여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문제 해결과 정책 불확실성 해소가 시급하다는 얘기다. 하영춘ㆍ류시훈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