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드라이브 '양평 벽계구곡'] 아홉구비 물길따라 가을을 맞는다

차창을 내리면 제법 쌀쌀한 바람이 머리를 맑게 하는 계절이다. 설악은 벌써 단풍으로 물들었는데 둘러보면 빼곡한 건물에,들리는 건 짜증나는 뉴스 뿐.깊은 산골짜기를 찾아 훌쩍 떠나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마음의 여유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반나절 쯤이면 다녀올 수 있는 드라이브 코스는 없을까. 경기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 계곡은 서울에서 차를 타고 30∼40분이면 갈 수 있지만 마치 강원도 오지에 와있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계곡은 명달리 마을을 지나 심산유곡으로 이어진다. 물줄기가 아홉굽이를 돌아 오른다고 해서 '벽계구곡'이라고도 한다. 계곡 입구 수입교를 건너면 삼거리를 중심으로 길이 양쪽으로 갈린다.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다. 어차피 길은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 길을 따르다보면 가마소,병풍소,박쥐소 등 깊은 소(沼)와 작은 폭포들이 이어져 아름다움을 뽐낸다. 옥류 사이로 반짝이는 푸른 돌들은 신비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계곡물 위로 갈대가 바람에 살살 흔들린다. 갈대를 뽑아 잉크에 적시면 바로 한 편의 서정시가 나올 것 같다. 한 젊은 부부가 그물에 어항까지 준비해 왔다. 손만 넣으면 잡힐 것 같은 민물고기들을 몰아보지만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잠시 차를 세우고 발을 담궜다가,보기보다 깊은 계곡물에 놀라 조심스레 세수만 하고 일어선다. 물에 비친 하늘 위로 돌을 던져 괜스레 심술을 부려본다. 다시 차를 타고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왼쪽으로 전통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하진 않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집이다. 조선말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위정척사론자였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선생의 생가다. 선생은 그의 부친이 2백년 전에 지었다는 이 집에서 스승도 없이 학문에만 열중했단다. 손때 하나 묻지 않은 맑은 계곡을 외세로부터 지키기 위해 벼슬까지 사양하고 내려와 구국지사들을 길러냈다는 선생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하다. 회암 주회,우암 송시열,화서 이항로 등 3명의 성리학자를 모신 사당,노산사지도 화서 선생의 생가 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구한말 어려웠던 시절을 지금의 한반도 상황에 대입해보는 고상한 역사기행도 잠시.어느덧 배가 고파온다. 화서 선생의 생가 바로 맞은편에 마을 매점 겸 토속음식점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머니가 아무렇게나 썰어온 도토리묵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잔을 걸치니 시장기가 달아난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