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요즘처럼 답답한적 없어" ‥ 내년 경영계획 수립 엄두도 못내

"웬만큼 어려운 순간들도 많이 넘겨봤지만 요즘처럼 답답한 때는 없었어요."(A그룹 구조본 관계자) "이 상태로는 아무 것도 못해요.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도 전혀 힘이 실리지 않고 있습니다."(B그룹 재무담당 임원)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한국 기업들은 모조리 뇌물 주는 'B급 기업'들로 전락했습니다. 또 그런 전철을 밟아야 하는 것입니까."(C그룹 비서실장) 검찰의 대선 비자금 수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지배구조 로드맵, 노동계의 동계투쟁(동투) 돌입 등을 바라보는 기업 관계자들의 착잡한 심사다. 예년 같으면 올해 경영목표 완수를 독려하고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에 착수해야 할 때이지만 외부적인 변수들로 인해 그룹의 '컨트롤 타워' 역할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푸념이다. 11일 재계에 따르면 검찰의 대선 관련 기업 비자금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주요 기업들의 불안과 동요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대부분의 그룹들이 '일상적인 업무의 차질없는 진행'을 당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을 뿐 내년도 단위사업 계획이나 포괄적인 경영방침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이 가장 걱정하는 대목은 이번 사건이 기업들의 일반 비자금에 대한 검찰의 수사 확대와 맞물려 지난 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는 것.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불려나와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대외신인도가 곤두박질쳤던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는 우려감이다. 게다가 기업들의 도덕성이 실추될 경우 이를 빌미로 정부와 시민단체 일각에서 또다시 강력한 기업규제책을 들고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치자금에 대한 청와대의 사면 방침과는 별도로 이번 사건으로 강경 규제론자들의 입지가 더욱 넓어질 공산이 크다"며 "이는 규제완화를 통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계는 특히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들고나온 시장개혁 로드맵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상황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다. 이같은 흐름에서 단기적으로 주요 그룹의 내부 리더십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고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이 원하고 있는 재계 총수와의 연쇄 회동도 기업들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민주노총이 총파업 등의 강경투쟁 방침을 정한 것도 생산성 및 기업 경쟁력 유지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 심한 홍역을 앓았던 노사관계가 호전되기는커녕 상호 대립적 관계 속에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것은 내년도 경기회복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라는 지적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