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영웅] 우남균 < LG전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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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뭐 하는 사람이오?"
"한번만 봐주세요. 조심할 게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 맨날 통금에 걸리는 거요?"
"예, 저는 금성사 직원입니다."
"그 회사는 밤 12시까지 일하나?"
"아, 그게 아니고, 저는 수출과 직원인데 바이어 접대 때문에…"
외국에서 바이어가 오면 내 차지였다.
말이 접대지, 바이어를 공항에서부터 술자리로 호텔로 모시고 다니는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귀가가 늦어질 수밖에.
번번이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 들락거리다 보니 순경이 이유를 물었고 내 명함을 보여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게 된 것이다.
"아! 그래요. 수출 때문이었군요. 그럼 그냥 가시오. 빨리 가서 자고 수출 많이 해야지요."
그는 내 손바닥에 파란 스탬프를 꾹 찍어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 때는 파출소 순경도 수출을 했다."
ROTC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통역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1974년 7월 금성사에 입사했다.
당시 수출과는 인기부서였지만 인원이래야 고작 이십여명.
지금의 수출조직이 3천여 명에 달하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수출전담부서인 수출2과에 배치돼 하는 업무중 하나가 바이어 접대였다.
당시 외국 바이어는 하늘처럼 여겨졌다.
금성사가 거래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제니스(Zenith)의 바이어는 정말 귀빈 중 귀빈이었다.
1974년 금성사의 수출액은 1천만달러 정도였는데 이 회사로 수출하는 금액이 전체 수출액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니스의 바이어가 떴다하면 수출부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수출을 하고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외국 바이어 앞에 모든 직원이 쩔쩔맸다.
그 때마다 내심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그래, 두고 보자. 언젠가는 너희가 우리 앞에 머리를 숙일 것이다"라며 다짐했다.
그로부터 이십 년 후, LG전자는 경영위기를 맞은 제니스를 인수했다.
1995년 인수 후 내가 회사 졸병 시절 우리 회사를 방문하던 구매담당자인 프레스턴씨가 여전히 근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아주 반갑게 재회를 했지만 입장이 바뀌고 말았다.
금성사는 1977년 국내 최초로 컬러TV를 개발했다.
오랜 투자와 기술개발 끝에 드디어 컬러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금성사가 19인치 TV 생산에 주력한 것이 영업 전략상 차질을 빚게 했다.
미국인의 기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소비자들은 통상 침실에는 작은 사이즈인 14인치 TV를 놓고, 거실에는 큰 사이즈인 19인치 TV를 놓았다.
이왕이면 거실에는 고급 브랜드 제품을 갖다 놓으려고 했다.
아시아산 제품보다는 미국산이나 일본산을 선택했다.
개발단계부터 시장조사를 하고 제품 사양을 결정해야 했는데 덜컥 큰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던 것이다.
바이어들은 아예 외면을 해버렸다.
"큰일났다. 미국에서 TV가 안 팔린다."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했는데 재고만 쌓였다.
"안 되겠다. 직접 들고 뛰는 수밖에."
회사는 궁리 끝에 미국에 현지판매법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세계화 전략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해외영업 특공대'를 만든다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1978년 초 뉴욕에 현지법인이 설립되었다.
특공대원은 총 네 명.
지사장은 현재 LG전자 중국지주회사 노용악 부회장이 맡았다.
국내에서 서류만 만지작거리다가 현지에서 직접 판매를 하려 하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답게 한편으로는 확실히 개방적이다가도 어떤 때는 한없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이었다.
물건을 팔려면 사람들을 만나야 할텐데 도대체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큰 유통업체의 구매담당은 걸핏하면 비서와 이야기하라고 했는데 비서조차 잡상인 취급하는 듯 했다.
미국에는 렙(REP)이라는 조직이 있다.
렙은 기업과 기업을 연결하는 복덕방 역할을 하는 회사로서 각종 수주와 시장분석을 전문으로 하며 커미션을 챙기는 회사를 말한다.
해외시장에 처음 진출하는 기업들은 자연히 이들에게 판매를 맡기게 된다.
렙에 판매를 맡기면 일이 쉬워지는 측면이 있으나 의존적이 되어 그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안 되겠다. 작전을 바꾸자."
우리는 작전을 바꿔 디스카운트 스토어(discount store)를 공략하기로 했다.
할인점을 집중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지사 직원 모두가 합숙을 하며 'TV를 못팔면 한국에 돌아가지 말자'는 각오로 24시간 붙어 지냈다.
특공대처럼 할인점들을 훑고 다녔다.
일단 가격경쟁의 우위를 내세우며 할인점을 뚫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대형제품의 선호가 일반화되면서 판매에 불이 붙었다.
캘리포니아의 멕시코 국경지대에서는 멕시코 상인들이 트럭을 몰고 와 현찰을 주고 '차떼기'로 제품을 싹쓸이해 가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뉴욕지사의 성공을 바탕으로 해외법인의 확대가 가속화되었다.
미국진출 초기에 우리가 기록한 매출액은 1천5백만달러.
본사에서는 기껏해야 2백만∼3백만달러를 기대했는데 목표를 5백% 이상 초과 달성한 것이다.
내년이면 LG에서 일한지 30년이 된다.
그 중 20여 년을 해외에서 일했다.
수출을 위해 세계각지를 뛰다보니 나의 항공기 마일리지는 밀리언 마일러(1백만 마일 이상)가 여러 개나 된다.
나는 LG전자 최초로 영업맨 출신 사장인 셈인데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묻곤 한다.
"당신의 영업 노하우가 뭡니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즐겨라."
나는 수출이 좋아서 그 일에 매달렸고, 지금도 수출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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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남균 사장 약력 ]
49년 경북 영주시 출생
72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76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 수료
90년 LG전자 구주지역담당 이사
95년 LG전자 북미지역본부장 상무
96년 LG전자 경영전략부문장 전무
98년 LG전자 디지털미디어 사업본부장 부사장
2001년 LG전자 디지털 디스플레이&미디어 사업본부장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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