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영웅] 변봉덕 <(주)코맥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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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말, 나는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옥죄는 빚 독촉의 올가미에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죽음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었다.
소주 한 병과 수면제를 사들고 남산을 올랐다.
서울 거리는 여전히 휘황한 네온과 질주하는 자동차의 불빛이 명멸하고 있었다.
어느 새 볼을 타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싸늘한 시체가 될 것이다.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다른 손에는 수면제를 움켜쥐었다.
막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 한 줄기 세찬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눈에 들어갔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눈이 몹시 쓰라려 손에 쥐고 있던 수면제를 바람에 날리고 말았다.
그 때 문득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심기일전의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말을 뇌까리며 그 길로 산을 뛰어 내려왔다.
그리곤 곧장 일본으로 향했다.
1972년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도쿄에서 열린 세계 전자박람회에 참석했다.
세계 전자제품의 진열장이라 불리는 곳을 샅샅이 뒤졌다.
'수출을 할 만한 신제품이 어디 없을까?'
1968년 '중앙전자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침 아키하바라의 어느 매장에서 신제품을 발견했다.
그것은 소형 트랜지스터 와이어리스 인터폰이었다.
이 제품은 20m 정도의 배선으로 가정 내에서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을 몇 개 사가지고 들어와 제품 분석에 들어갔다.
궁리 끝에 디자인과 회로를 우리 실정에 맞게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서 간단한 영문 카탈로그를 만들어 외국의 무역상과 접촉했다.
몇 주일 후 신기하게도 같은 날 미국 영국 등 두 나라에서 연락이 왔다.
마침내 1973년8월3일 코맥스 처녀 수출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우리나라 수출 역사상 최초의 홈 오토메이션 제품이 수출된 날이기도 하다.
불과 몇 백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금액이었지만 기쁨은 컸다.
다음 해, 시카고에서 열린 전시회를 보러 갔다.
신제품 조사를 하고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해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뉴욕의 KOTRA 사무실을 찾아갔더니 그들도 인터콤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뉴욕 시 지도를 구입해 호텔로 돌아왔다.
그 지도를 펴놓고 북쪽부터 전자제품 가게나 사무소를 찾아 전화를 걸고 미팅 약속을 잡았다.
"아니, 이렇게 품질 좋고 싼 제품이 있습니까? 당장 사겠소."
그들은 제품 샘플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품질면이나 가격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쌌던 것이다.
"1백대를 사겠소."
"그럼 신용장을 개설해 주시오."
"신용장? 그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현금으로 주겠소."
1백대 주문 해봐야 기껏 5백달러 정도였다.
그들에게 신용장 운운하는 것이 우습게 들렸을 터였다.
게다가 그들은 소매업자였다.
하는 수없이 추후 공급을 약속하고 그들에게서 도매업자를 알려달라고 하여 찾아 나섰다.
영어를 잘하는 친척에게 부탁해 미팅 약속을 잡아달라고 했더니 일주일 후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호텔비로 다 까먹고 나면 돌아갈 돈도 없겠다 싶어 직접 섭외에 나섰다.
떠듬거리며 말하는 동양인에게서 호감을 느꼈던 지사장이 직접 상담에 응해 주었다.
"한국에서 이런 제품이 나옵니까?"
'레카톤'사의 사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수한 품질에 가격도 일본의 반값이라며 기뻐했다.
"사장님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태도에 파트너로서의 신뢰가 갑니다. 일만 개를 보내주시오."
3만달러짜리 계약이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외환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해외여행자들이 갖고 나갈 수 있는 경비는 고작 1천달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싼 여관에서 묵을 수는 없었다.
현지 파트너들이 자칫 얕보고 협상 하기를 꺼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상의 호텔에서 자리를 잡고 대신에 음식비를 최대로 줄여 버틸 때까지 버텼다.
한국 상품 자체에 대한 신뢰가 없던 시기라 바이어들이 만나주지도 않았다.
"1천달러어치만 보내 주시오."
정말 속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기껏 1천달러라니.
이 정도 주문량은 경비를 감안하면 수출하면 할수록 손해였다.
"생큐, 베리 머치."
결코 싫은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요구에 기꺼이 응했다.
그들이 코맥스의 신용도와 현지 고객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러한 소량주문은 국가마다 제품의 규격과 선호도가 달라 제품을 개발하는 데는 상당한 자금이 소요되었다.
소량을 주문한 후에 지속적인 주문이 없으면 기업으로서는 막대한 손실이었다.
직원들의 불평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였다.
미래를 내다본 해외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세계 어디든 단 한 개라도 공급한다는 시장 다변화전략은 한국의 중소기업 코맥스를 세계 속의 기업으로 만드는 핵심요소가 되었다.
1983년 4월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월례 경제 간담회가 열렸다.
대통령을 비롯한 경제부처 장관과 대기업 총수들이 모였는데 유일하게 나는 중소기업체 사장 자격으로 동석했다.
회의실에는 청와대 경제관료와 관련부처 장관들, 그리고 30여명의 대기업 오너들이 앉아 있었고 나는 맨 끝자리에 앉았다.
간담회가 진행된 지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대통령이 나를 부르는게 아닌가.
"아, 중앙전자 변봉덕 사장님 나오셨습니까?"
잔뜩 긴장한 채 벌떡 일어났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여기 계신 변봉덕 사장님은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계시지만 대기업 못지않게 수출실적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인터폰을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만들어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수많은 중소기업 가운데 간담회에 유일하게 참석시킨 이유를 손수 설명하였다.
그리고서 경제관료들에게 중소기업들이 수출에 매진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수출이 대통령의 지시나 경제관료들의 도움으로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출은 기업인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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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봉덕 회장 약력 ]
40년 평양 출생
62년 한양대 수학과 졸업
87년 한양대 경영대학원 졸업
68년 중앙전자공업사 창립
79년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이사
94년 톈진중앙전자유한공사 설립(총경리 취임)
97년 한국전기제품안전진흥원 이사장
97년 전자파장해공동연구소 이사장
99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