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출영웅] 변효수 <(주)국동 회장>

내가 의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순전히 달러를 벌기 위해서였다. 6ㆍ25 전쟁에 참전, 부상으로 제대를 한 후, 나는 달러를 벌기 위해 동두천 미7사단으로 갔다. 미군부대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들었다. 미군 관계자가 업종을 부를 때마다 사람들이 손을 드는데 그 광경이 가히 대나무 숲이 쓰러졌다 일어났다 하는 것 같았다. 키가 크지 않았던 나는 아무리 손을 들어보아야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군복!" 하고 부를 때 얼른 지갑을 빼내 높이 들었다. 눈에 띄었던 것은 당연한 일. 당일부터 취업이 되어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군복 일은 1967년 말 서울 종로구 연지동, 구 기독교방송 사옥 302호에 회사를 차림으로써 기업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미군 부대에 여러 개의 지소를 개설했고, 이듬해는 베트남에도 진출했다. 내가 직접 베트남에 가서 계약을 하고 우리 기술자들도 다수 파견했다. 이른바 '월남 특수'는 1973년 철수 때까지 이어져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월남 특수가 끝나자 무엇을 할까 궁리하던 나는 역시 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수출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수출을 하려하니 쿼터라는게 걸림돌이었다. 조사해보니 쿼터가 없으면 수출은 꿈도 꾸지말라는 것이다. "방법이 있겠지. 부지런한 사람은 방법을 찾고, 게으른 사람은 구실을 찾는다고 했겠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유럽의 속옷류는 손을 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쿼터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파자마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돈을 다 투자해 공장을 차렸다. 우리는 파자마하면 잠잘 때 입는 속옷으로 생각하지만 유럽의 파자마는 집안에서 입는 니트류의 실내복이다. 당시 파자마는 국동의 독점 품목이었다. 수출이 늘어날수록 쿼터가 문제였다. 쿼터는 연말까지의 실적을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물량 선적이 12월 31일을 넘기면 안됐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어느 해인가 폭설이 내렸다. 사람도 다니기 어려울 지경인데 수송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안돼!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를 넘기면 안 된다." 결국 운전기사를 독려해 폭설을 뚫고 부산까지 네시간만에 내려가 물량을 맞췄다. 쿼터전쟁이 심해지자 통관 기준으로 정해지던 쿼터실적이 선적기준으로 바뀌어 버렸다. 물량을 배에 싣고 배가 항구를 떠나야만 쿼터를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말에는 모든 업체들이 쿼터를 채우느라 물량을 한꺼번에 내려보내 부두에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였다. 선적을 하는 데만 며칠이 걸릴 지경이었다. "방법을 찾아봅시다." 수출업자들과 세관에서 머리를 짜낸 방법은 바로 '외항 작전'. 일단 부두에 쌓인 컨테이너 일부를 샘플로 싣고 배는 부두를 떠난다. 그로써 선적증명은 완료된다. 서류가 끝나 무선으로 연락을 하면 외항에 나가 있는 배가 다시 부두로 돌아와 전체 물량을 싣는 것이다. 몇만t 짜리 배가 단지 선적증명을 떼기 위해 외항과 내항을 오가곤 했으니 쿼터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정말 눈물겨운 것이었다. 쿼터가 회사의 운명 같았던 시절이었다. 198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뿔르가등에 공장을 지었다. 그런데 공장을 완공하기도 전에 프랑스의 Auchan사로부터 니트 6천장의 급한 주문이 들어왔다. 설립인가가 나오지 않았지만 허가가 떨어지면 바로 공장을 돌릴 생각으로 원부자재를 선편으로 보냈다. 그런데 공장 인가가 나지 않았으므로 통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자재들이 부두에 묶이게 됐다. 한 달 후 통관서류를 가지고 세관에 갔더니 컨테이너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컨테이너를 찾아내시오." 그런데 세관 직원들의 표정은 강 건너 불 구경. "필요하면 당신들이 찾으시오." 정말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사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도난 사건이 잦았다. 심지어 컨테이너 상반부를 용접기로 도려내고 물건을 훔쳐 가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인도네시아 현지 대리인이 발벗고 나섰다.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원자재를 찾으러 다녔다. "찾았습니다!" 얼마 후 대리인이 상기된 표정으로 달려왔다. 우리의 원자재를 가져갔다면 분명 관련업자들일 것이라 추측하고 사람을 풀어 알아보았더니 역시 그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이다. 자재에는 우리의 딱지가 붙어있어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자재를 찾고 보니 수량이 많이 부족했다. 이미 상당부분은 써버린 것이다. 컨테이너 사고는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공장이 한창 잘 돌아가던 1992년, 프랑스에 2만장의 니트를 선적해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왜 빈 컨테이너를 보냈습니까?" 프랑스 바이어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빈 컨테이너라니? 분명 물량을 선적했는데?" 직원들에게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더니 컨테이너 안에는 물량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고 나머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액수로는 약 3만달러. 공장 설립 초기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조사를 의뢰했더니 범인들은 컨테이너 볼트를 빼고 물량을 훔쳐간 것으로 추정되었다. 컨테이너 사건의 결정판은 1995년 태풍 때의 일이다. 생산을 위해 원부자재를 부산에서 선적해 보냈다. 그런데 급전이 날아들었다. "태풍으로 우리 컨테이너를 모두 바다 속에 버렸답니다." 보고를 받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바다에 버려?"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컨테이너가 고기 창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컨테이너를 싣고 가던 배가 남중국해에서 태풍을 만났던 모양이었다. 컨테이너 선은 웬만한 태풍에는 끄덕 없이 견디는데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다. 위험을 직감한 선장은 결국 선적한 컨테이너를 버리도록 명령했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속에 크레인으로 하나씩 버려지는 컨테이너.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회사의 입장에서는 처참한 순간이었다. 그 컨테이너는 국동의 역사를 간직한 채 아직도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노동집약적인 "섬유산업은 사양산업이다"는 말들이 떠돈다. 나는 이 말에 불만이 많다. 그렇다면 유럽의 선진국들은 왜 사양산업인 섬유를 붙들고 있는가? 섬유산업은 절대 사양산업이 아니다.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의식주 중 하나를 차지하는 섬유산업이 어떻게 사양산업이 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경쟁력이다. 경쟁력을 갖춘 섬유산업은 기간산업이다. 국동은 앞으로도 그 기간산업의 일꾼을 자임하며 수출한국의 깃발을 드높일 것이다. ----------------------------------------------------------------- [ 변효수 회장 약력 ] 30년 경북 영주군 하망읍 출생 50년 영주농업중학교 졸업 55년 주한미군 군납업 67년 국동기업㈜ 설립 및 대표이사 79년 상공부장관 표창 80년 한국메리야스 수출조합 감사 85년 국무총리 표창 96년 5천만불 수출의 탑 및 철탑산업훈장 수상 2002년 P.T.SEMARANG-GARMENT 설립 2003년 7천만불 수출의 탑 수상 2003년 ㈜국동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