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열며]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들..李浩哲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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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해, 2004년, 갑신년을 맞이했다.
돌아보면 20세기를 지나 새 21세기,2000년을 맞이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또 4년이 지나 있다.
세월 가는 것이 참으로 시위를 떠난 화살같다.
이 새해를 맞으며 우리 주위를 돌아 보면 온통 구린내 천지다.
소위 검찰의 대선자금 조사라는 거며,그 뒤로 이어질 '특검'이며,끝내 만천하에 드러난 '측근 비리'라는 거며,줄줄이 형무소로 들어가고 있는 번듯하게 잘 생긴 사람들이며,그 뿐인가,농민들의 FTA 반대 격렬시위며,광우병 소동이며,도대체 이 나라가 어느 날인가에는 통째로 송두리째 주저앉게 되지나 않을까,아슬아슬하기까지 하다.
하여,이 자리에서는 우리 시야(視野)를 한껏 넓혀 1백20년 정도 뒤로,19세기 말 1880년대쯤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1882년의 임오군란은 민씨 척족 정권의 무능과 부패,탐욕이 자초한 재앙이었다.
민비가 권력을 장악한지 9년여 만에 국고는 완전히 거덜이 나 있었다.
하여, 군대 병졸들은 13개월 동안이나 급료를 못 받았다.
군졸들의 불만이 심상치 않자 13개월만에 겨우 한달치 급료를 준다면서 나누어 준 것이 모래가 반이나 섞인 쌀이었다.
이런 형편임에도 민비는 자신이 낳은 세자,뒤의 순종을 위해서라면 돈을 물 쓰듯 했다.
두 살배기 아들을 세자로 책봉 받기 위해 청나라 이 홍장에게 엄청난 뇌물을 가져다 바쳤다.
유명한 점쟁이 이유인은 점 한번 잘 쳐주고 즉석에서 비단 1백필과 돈 1만냥을 받았다.
1888년에 우리 외교 사절이 공적(公的)으로 태평양을 횡단,19일 간의 항해 끝에 미국에 가 닿는데,그때 그 배에 같이 탔던 알렌이라는 미국 사람의 눈에 비쳤던 우리 외교 쪽 고위관리들의 모습을 담은 다음과 같은 일기 한 토막이 남아 있다.
'공사(公使)는 약하고 우둔한 인물이며 공식 통역관은 바보로서 영어도 할 줄 모른다.
일행중 또 한명은 슬금슬금 눈치만 보는 사람이고 참을 수 없을만큼 불결하다.
더욱이 그들은 대변을 볼 때 변기에 앉는 대신 서서 볼 것을 고집해 항상 변소를 더럽힌다.
연신 담배를 피우는 데다가 통 목욕을 하지 않음으로써 몸에서 나는 냄새와 담배 냄새 등이 뒤섞여 그들의 방에서는 늘 악취가 풍긴다…나는 매일 아침 공사 방으로 가 그를 깨운다.
그들 방에는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의 옷에서는 스멀스멀 이가 기어 다니고 괴상한 냄새들이 났지만,누구 하나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 보다 4년 앞서 바로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민영익 일행이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양 세계를 돌아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지만,그들 중 누구 하나 자신들의 그 놀라운 체험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없다.
오직 고종에게 보고 들은 바를 몇 마디 말로 아뢴 것이 통틀어 전부였다.
그 때 만일 민영익 홍영식 일행 가운데 저들이 보았던 서양 사람들의 풍속과 위생 습관 같은 것을 본 그대로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정보를 공유(共有)했더라면 4년 뒤의 미국 행에서 앞에서 본 것과 같은 모욕적인 비난은 모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서양 견문기는 1895년에 발간된 유길준의 저 '서유견문'이다.
그가 수행원으로 민영익을 따라 미국에 첫 발을 딛고 12년 만이었다.
19세기 말의 우리 실제 형편이 이러했던 것이다.
자 어떤가.
1백20년 전 그때의 우리 정황을 이런 식으로라도 흘낏 돌아보고 나서 다시 오늘의 우리 정황으로 돌아와 보면,어떤가….
우선 안도의 큰 숨부터 나오지 않는가.
여·야의 대선자금이다 뭐다, 특검이다 뭐다, 측근 비리다 뭐다. 이런 모든 것이 언제라도 한 번은 된통 겪어내야 할 일이었던 바에는 이 참에 철두철미하게 치러내는 것이 제대로 순서가 되지 않을는지…. 이 점,필자는 긴 눈으로는 썩 낙관하고 있다.
지난 40,50년 간 누적됐던 정치권의 비리를 비롯해 하나하나 걷어 내자면 이만한 과정은 응당 한번은 치러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