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그래도 역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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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7일 오전 9시30분 뉴델리 북부에 있는 재래시장 '찬드니초크(일명 달빛광장)'.신년기획 시리즈 '아시아를 다시 본다' 취재를 위해 근처 여학교를 찾았다.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낯선 광경이 눈길을 붙잡았다.
인근 시크교 사원에서 나눠주는 음식을 받아 먹기 위해 수백명의 헐벗은 사람들이 도로를 따라 줄지어 앉아 있었다.
비참한 행렬을 뚫고 교문을 들어서자 해맑은 표정의 여학생들이 오가는 평화로운 교정이 나타났다.
기자를 맞아준 교장 선생님은 "매일 아침 벌어지는 일이에요.
등교길에 이 모습을 보는 학생들은 나중에 정치인이 돼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기도 하죠.정부가 '분배를 위한 성장' '저소득계층이 함께 잘 살게 되는 성장'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같은날 오후 아디티야 무케르지 네루대 교수를 만나 아침에 겪은 얘기를 꺼냈다.
그는 "인도가 택해야 할 노선은 '선(先)성장,후(後)분배'"라며 "가난을 분배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지난 91년부터 자유시장경제를 수용,본격 경제개발에 나선 인도는 2002년 GDP(국내총생산) 규모가 한국과 비슷한 4천6백50억달러였다.
하지만 인도는 10억명이 넘는 인구가 나눠 가진 1인당 GDP가 5백달러로 한국의 1만달러보다 한참 적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은 1년간 '성장이냐,분배냐'를 놓고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인도 취재를 마치면서 "'선 성장'은 1인당 GDP가 우리보다 못한 인도가 가야할 길이지 한국은 상황이 다른 것 아니냐"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적절한 분배,동반성장'을 둘러싸고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성장동력이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귀국하기 위해 뉴델리 국제공항으로 가는 길.자동차에 매달려 울며 구걸하는 어린 소녀에게 10루피(약 2백50원)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며 "그래도 역시 성장"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뉴델리(인도)=장경영 산업부 대기업팀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