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다운시프트족(族)

"우리는 속도의 노예가 됐다. 이 속도는 우리의 습관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사생활을 침해하고,우리로 하여금 패스트푸드를 먹도록 하는 빠른 생활을 강요한다. 음흉한 바이러스에 우리 모두가 굴복당하고 있다."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채택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의 선언문이다. 패스트푸드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스피드 문화에 반기를 들고 느리게 살면서 생활의 여유를 찾자는 것이 슬로푸드 운동이다. 서구인들 사이에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스스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부쩍 두드러지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속도전쟁을 벌여야 하는데 이제는 속도에 지친 탓이다. 199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슬로비(Slobbie)족은 물질보다 마음을,출세보다 가정생활을 중시하며 어질러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생활의 속도를 늦춰 느긋하게 살자고 주장한다. 슬로비족과 비슷한 생활태도를 갖는 스카이버(Skiver)족도 속도를 중요시하는 현대사회에서 브레이크를 밟자고 외치고 있다. 최근에는 다운시프트(down-shift)족도 나타났다는 소식이다. 이들 역시 사회적 지위나 수입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삶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다운시프트는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기아를 변속하는 것인데 삶의 속도를 조절한다는 의미로 이를 차용했다. 다운시프트가 가장 활발한 영국에서는 올해 말에 가면 다운시프트족이 3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가을 용인에서 '느린문화학교'가 문을 열었다. 느릿느릿한 삶에서 여유와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압축성장이 가져온 '빨리빨리'의 생활태도를 바꿔 '느림의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의도가 배어 있다. 느림은 게으름과는 다르다. 빠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느림의 미학'에서 얘기하듯 창조적 게으름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천천히 산다는 것이 배부른 자들의 사치로 치부될 수도 있겠으나,가끔은 자신을 뒤돌아 보는 여유를 갖는 것이야 말로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유지하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