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장인정신 .. 이윤재 <피죤 회장>

yjlee@pigeon.co.kr 몇 해 전 일본 출장 때 일이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현지의 산중에 있는 전통 여관에 숙박 예약을 했다. 도착 예정 시간은 해질녘 쯤이었고 모든 스케줄은 식사 후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리타 공항에서 비행기 연착으로,또 그 여관으로 가는 도중에는 길을 잠시 잃는 바람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다. 피로와 시장기가 몰려온 나는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저녁 준비에 한시간 정도 걸릴 테니 죄송하지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손님 도착예정 시간에 맞춰 저녁 준비를 해 놓았지만 늦게 오시는 바람에 다시 새것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우스운 이야기일지 몰라도 일본에선 '신장개업'하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의 음식점들이 대대로 가업을 잇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그만큼 자부심도 맛도 최상의 것을 고집하게 마련이다. 산속의 작은 음식점도 이럴진대 하물며 기업은 어떨까. 서비스와 장인정신에 대한 일본 사회의 철저함에 대해 은근한 부러움 반 시기 반의 감정이 밀려왔다. 지금은 오랜 침체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내 일에 대한 자존심과 투철함으로 무장한 그들의 경쟁력은 세계경제라는 수레바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여전히 그 영향력이 유효하다. 사실 옹기를 굽는 장인의 정신은 변화와 임기응변의 21세기적 시류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때로 과거의 소중한 무엇이 한시대를 건너뛰면 그 가치를 복원하는 아이러니를 가끔 경험하게 된다. 나와 우리 세대가 겪은 20세기 근대사는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의 시대였다. 이런 양적 팽창의 시대에는 장인의 철저함보다는 빨리,많이 만드는 것이 최고의 선(善)이었고,사실 그런 과정이 오늘의 우리를 가능하게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이런 조급함(?)은 그토록 갈구하던 경제적 풍요의 실현으로 사라지고,다양성과 전문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다.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의 감각은 나날이 세련되어지고,'나만의 상품'을 찾는 취향을 상품 구매의 선택 기준으로 갖게 되었다. 소비자들의 개별성과 전문성의 요구는 횡적인 다변화,혹은 대량 생산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장인정신은 '돌아온 장고'처럼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한 기업의 혼을 투영할 잣대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경쟁력 있는 모델로 되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