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시장개입…분별없는 열정..정규재 <경제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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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무지를 변호하는 단어에 불과한 경우조차 많다.
'신중(愼重)' 또는 '현려(賢慮)'로 번역되는 'prudence'라는 단어가 자본주의의 근간으로까지 간주되는(막스 베버) 것도 그래서다.
그것은 리스크 관리 정신이며 목표와 방법,이념과 수단을 분간하는 합리적 정신이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과정은 '리스크 관리의 부재',다시 말해 분별 없는 열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준 하나의 전형이다.
원화를 방어한다는 '애국적 열정'에 사로잡힌 당국자들이 수백억달러를 퍼부으면서 외환보유액을 탕진해 갔던 일은 지금 되돌아보더라도 정말 기막힌 일이었다.
당시 재정경제원의 모 간부는 "투기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스스로를 충돌질해 갔었다.
정부가 환율의 자유낙하(free drop)를 허용하며 백기를 든 것은 국가 파산의 위기가 목에까지 차올라왔던 97년 11월19일이 되어서였다.
어리석음의 기념비 같은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6년도 더 지난 지금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재경부는 최근 떨어지는 환율을 막아내기 위해 차액결제선물환(NDF) 계약을 적어도 15조원어치나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외국환평형기금 채권으로 사들인 달러를 스와프하는 방법으로 한도의 2배,3배에 달하는 달러를 또 사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다는 소문이니 사태가 심각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 어떤 수치도 확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국가의 재원이 환율 방어에 투입되고 있는지는 알 수조차 없다.
물론 97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원화 약세를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환보유액이 고갈될 일은 없다는 사정의 차이는 있다.
그러나 약세 방어라고 해서 비용이 들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려스러운 NDF 투자 손실도 그렇지만 수입 물가 상승과 수입 업체에 대한 사실상의 세금 수취 등 눈에 드러나지 않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문제는 외환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누구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알 수도 없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침묵이며,한국은행은 입을 꿰맨 지 오래다. KDI 같은 연구기관들도 재경부의 위세에 눌려 있을 뿐이다.
국회가 있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부재 중'이다.
4월 총선을 통해 새 국회가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열정만 앞세운 얼치기 개혁가들이 대거 등장할 것도 뻔한 일이어서 그들에게 정부를 감시하는 역할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오직 언론이 남는다고 하겠는데 정부가 비밀주의의 방패 뒤에 숨어 있는 상황에서 자칫 언론중재위원회에나 불려 다닐 게 뻔하고 더 나쁜 경우라면 소송을 당할 가능성도 활짝 열려 있다.
결국 국가 리스크 관리체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부재(不在)다.
수십조원을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일은 삼성전자라고 하더라도 이사회를 수십번은 더 열어야 하는 엄청난 위험부담 행위다.
그 누구도 소수의 관료집단에 그 같은 무한 책임을 맡긴 적도,요구한 적도 없다.
일본 재무성이 무지막지한 시장 개입을 감행하고 있다지만 적어도 그 활동내역만큼은 매월 정확하게 공개하고 있어 모르쇠로 일관하는 우리 정부와는 다르다.
김진표 경제 부총리는 "스무딩 오퍼레이션일 뿐"이라는 설명을 되풀이하지만 NDF 거래 금지 조치까지 내놓은 마당에 '스무딩' 운운하는 것은 외환실무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거나 진실을 호도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최중경 국제금융국장은 어제 "발권력이라도 동원하겠다"고 말했다.
누가 이들의 분별없는 열정을 멈추게 할 것인가.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