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칠레 FTA 비준안 또 무산] 국제통상 '미아' 자초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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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국회 상정 후 해를 넘기며 7개월간 표류하던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통과가 총선을 앞 둔 국회의원들의 '몸사리기'로 또다시 좌절됐다.
국회는 오는 16일 본회의에서 FTA 비준안을 다시 논의키로 했지만 투표방식조차 정하지 못해 국회 통과는 극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칠레와 오랜 협상 끝에 FTA 체결을 이끌어 내고도 정치 논리와 농민단체 등 이익 집단의 반발로 국회 비준 자체가 안돼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국제적 불신과 함께 '통상 망신'을 자초하게 됐다.
◆ 정치 논리에 침몰하는 '통상 한국' =한ㆍ칠레 FTA 협상이 공식 타결된 건 지난 2002년 10월.
이번 비준안 통과 실패로 협상 타결 후 1년4개월이 넘도록 FTA 협정안이 '빛'을 보지 못한채 좌초 위기를 맞았다.
지난 7월 비준안이 국회에 상정된 이후 '표밭'을 의식한 농촌출신 의원들의 강경한 저지에 정부와 국회 전체가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급진 성향을 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 단체들은 국회의원 1백47명을 대상으로 FTA 반대 서명을 이끌어내며 '꼬리표'를 달아놓는 등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정치권을 압박하고 있다.
집단 논리와 정치적 이해 관계가 한국 통상정책의 전환점이 될 한ㆍ칠레 FTA의 출범을 좌초시킬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위기의 'KOREA' 브랜드 =정치 논리에 한ㆍ칠레 FTA가 '공(空)회전'하고 있는 가운데 칠레 시장에서 'KOREA' 브랜드의 위상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KOTRA에 따르면 작년 2월 칠레와 유럽연합(EU)이 FTA를 체결한 직후 같은 해 5월까지 칠레의 총 수입액(55억달러)중 EU로부터의 수입액은 2억4천만달러로 3천만달러 가량의 수입이 EU로 전환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미국과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같은 기간 각각 1천만달러와 9백40만달러씩 감소했다.
지난 2002년 대(對)칠레 수출의 27.7%를 차지했던 자동차의 경우 2001년 시장점유율 1위(23.6%)에서 일본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차례차례 밀리면서 작년 말에는 4위(18.8%)까지 추락했다.
◆ 통상 족쇄로 전락 =한ㆍ칠레 FTA 비준 무산은 GDP(국내총생산)의 무역 의존도가 66%(2002년 기준)에 이르는 한국이 국제통상 질서의 한 축으로 떠오른 FTA의 큰 흐름에서 '외톨이'로 떠돌고 있음을 또한번 확인시켜줬다.
지금까지 WTO에 보고된 FTA 발효 건수는 모두 1백89개에 달하지만 이중 한국은 단 한 건도 참여하지 못한 상태다.
아직껏 한 건의 FTA도 발효시키지 못한 나라는 1백48개 WTO 회원국 중 한국과 몽골 두 나라뿐이다.
한ㆍ칠레 FTA 비준안이 오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다시 논의될 예정인 만큼 '기사회생'의 불씨는 아직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진표 경제부총리 등 총선에 출마할 관련 부처 장관들이 11일 교체될 예정이라는게 또다른 변수로 꼽힌다.
올해부터 정부간 협상이 본궤도에 오르는 일본 싱가포르와의 FTA 추진도 한ㆍ칠레 FTA 비준 표류로 추진 동력이 반감될 전망이다.
통상전문가들은 한ㆍ칠레 FTA 표류는 경제적 손실보다도 국제무대에서의 국가신인도 하락이라는 부작용이 더 크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인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은 "비준 연기는 칠레와의 외교관계 악화는 물론 한국의 대외신인도 하락을 불러올 수 있다"며 "향후 FTA 추진의 기폭제로 작용해야 할 한ㆍ칠레 FTA가 오히려 족쇄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