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팰런 행장의 조용한 訪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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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선 상식적인 행동이나 말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진다.
엊그제 뉴욕을 다녀간 로버트 팰런 외환은행장의 상식적인 행동도 상식이 통하지 않던 뉴욕 현지의 한국 금융관행에는 이상했던 모양이다.
신선했다는 평도 나온다.
팰런 행장은 그저 조용히 다녀갔다.
공항에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하고 콜택시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약속한 시간에 직원들과 회의를 한 뒤 공항 배웅도 받지 않고 떠났다.
팰런 행장이 뉴욕을 방문한 것은 비자 갱신이라는 사적인 용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란한 의전에 익숙해 있던 현지 직원들엔 낯설었던 모양이다.
외국 은행장의 달라진 모습을 실감했다고 한다.
해외 근무자들에게 본사 최고 경영자의 방문은 연중 최대 행사로 통한다.
공항 영접에서부터 목적지로의 이동까지 한치의 오차가 없도록 도상 연습을 한다고 한다.
일을 잘못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만 의전을 잘못하면 끝장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의전을 잘못했다가 인사 조치된 사례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컴퓨터 같은 치밀한 영접으로 점수를 딴 직원도 있다고 한다.
현지 직원의 대접을 받지 않은 팰런 행장의 평범한 행동이 화제가 되는 것은 은행의 과잉 모시기 관행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이덕훈 우리은행장은 요란한 공항 영접에 일침을 놓은 적도 있다.
당시 우리은행 지점장들은 일제히 공항에 나가 이 행장을 맞았다고 한다.
학자출신으로 비교적 격식을 따지지 않는 이 행장에게는 검은색 양복을 입은 지점장들의 도열 영접이 어색했던 모양이다.
앞으론 필요한 직원 외에는 쓸데없이 나오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최고 경영자들의 권위는 미국 기업이 한국 기업보다 더할 지 모른다.
월가 최고 경영자를 만나 본 사람들은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에 놀란다.
그렇지만 그같은 영향력은 업무 관계에서 발휘하는 것이지 불필요한 의전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
한국기업들의 해외 직원들도 이제 공항에서의 과잉 영접 같은 낡은 의전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뉴욕=고광철 특파원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