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연체와…中企는 자금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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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OO사 김 사장에게 전화(친구 박 사장에게도 전화), 낮 12시 OO병원 박 원장과 점심, 오후 3시 정OO 사장 재산 조회 의뢰….'
시중은행에서 RM(기업여신전문) 점포를 맡고 있는 A지점장의 2일자 수첩에는 이런 메모가 가득하다.
모두 연체 거래선과 관련된 내용이다.
우선 출근과 동시에 최근 두 달째 이자가 연체된 김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자 납부를 독촉한다.
이어 김 사장을 소개해준 박 사장에게도 전화를 해 "김 사장이 여유가 생기면 우리 이자부터 먼저 갚게 말 좀 해달라"고 '지원사격'을 부탁해둔다.
박 원장과의 점심 약속은 최근 담보대출을 해줬다가 연체가 발생한 C병원 문제 때문이다.
C병원이 아예 문을 닫을 예정이어서 박 원장에게 C병원 건물과 시설 인수 의사를 타진하려는 것이다.
박 원장이 인수하면 차주(借主)가 바뀌면서 연체 문제도 자동으로 해결된다.
최근 각 은행들의 기업여신 담당자들은 이처럼 '연체와의 전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소기업 연체율이 빠르게 고개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올 1월 말 현재 시중은행의 중소기업대출 연체율은 1~3%까지 높아졌다.
반면 자금시장의 다른 한편에선 중소기업들이 '자금난과의 전쟁'에 허덕이고 있다.
컴퓨터 부품 제조업체인 S사 J사장은 지난 한 달 동안 돈줄만 찾아 쫓아다녔다.
지난해 말 받기로 한 납품대금 6억원을 받지 못해 갑자기 운전자금난에 몰렸기 때문이다.
중국으로부터 1백10만달러어치의 주문을 받아놓고도 돈이 없어 공장을 돌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무선통신기기 제조업체인 중원시소스의 김용설 사장도 인도네시아로부터 자동차용 무선기기 90만달러어치를 주문받았으나 운전자금 3억원을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김 사장은 "이렇게 번번이 돈에 쪼들리느니 차라리 중국으로 공장을 옮길 작정"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중소기업 대출 규모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만큼 자금시장 전체가 경색됐다고 볼 수는 없다"며 "다만 은행들이 위험관리를 강화하면서 한계기업들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 박승 한국은행 총재, 청와대 정책실 관계자 등이 2일 중소기업 대출 문제 등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져 정부 차원의 대책 수립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