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빈곤의 여성화 .. 咸仁姬 <이화여대 교수ㆍ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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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국 여성학계를 강타한 건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 현상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도대체 누가 빈곤층인지 주목하고 보니,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여성 가장들이 빈곤층의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혼율이 50%를 넘나들던 상황에서 이른바 '싱글 맘'이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거액의 위자료를 챙긴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이혼여성 이미지는 미디어가 창출한 거품임이 드러났고, 실제 상황인 즉 '여성은 이혼 후 평균 70%의 생활수준 하락을 경험하고 남성은 평균 30%의 생활수준 상승을 경험한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이혼율 급증으로 인한 '한(부)모 가족'의 증가와 더불어 '빈곤의 여성화'가 서서히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듯 하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여성가구주 비율은 2000년 현재 18.5%로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다.
남편의 가출 등으로 인한 실질적 여성가장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은 더 늘어날 것이다.
1998년 한국여성개발원 조사에서는 남성가구주 및 여성가구주의 빈곤율이 각각 17.8% 및 39.6%에 달해 여성가장의 빈곤 문제가 보다 심각함을 실증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빈곤층 여성가장을 지원하는 정책으로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저소득층 모자가정을 대상으로 한 모자복지법 두 가지가 있다.
두 법 공히 '요(要)보호 대상' 집단에 대한 최소한의 지원책으로서 대상자 수가 극히 제한되어 있거니와 수혜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성가장의 빈곤은 여성문제,가족문제 그리고 빈곤문제가 중첩해서 나타나는 사회적 이슈이기에 그 양상이 매우 복잡함은 물론 해결 방안 또한 단순치가 않다.
서구에서도 '빈곤의 여성화'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번번이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왔다.
복지정책을 강화할 경우 국가의 재정부담은 물론 취업보다 실업을 선호하는 유인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으며, 정상가족이 아닌 '열등가족'을 국가가 지원함으로써 이를 방조할 여지가 강하다는 것이 반대의 주 논지였다.
그러나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빈곤의 여성화를 둘러싸고 패러다임의 의미있는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일단은 누구라도 생애주기를 지나는 동안 싱글 맘이 될 확률이 높아진 현실에 주목해 미숙련·저임금·비정규직에 집중되어 있는 여성의 산업예비군적 취업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정책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소극적·수동적 welfare로부터 적극적·능동적 work-fare로 이동해감은 여성빈곤층에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보다 주목할 만한 전환은 정책의 초점을 빈곤여성으로부터 그들의 자녀중심으로 이동해가면서,이들을 위한 양육 및 교육에 '국가 보험'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자녀 세대를 위해 적정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깨끗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충분한 영양섭취 및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확보해 주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빈곤의 세습화를 방지함으로써 장기적으론 국가의 재정부담을 완화시켜 주리라는 기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부)모 가족에 부과되는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한 때 "결손가족일수록 청소년 비행이 높게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가 회자된 적이 있으나 실상은 빈곤이 결손가족을 낳고 동시에 청소년 비행률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함이 입증되었다.
최근 우리나라 연구에서도 경제적 문제가 해결된 한(부)모 가족의 경우는 자녀들의 만족도가 불행한 정상가족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유일한 걸림돌은 이혼가족을 향한 부정적 시선임이 밝혀졌다.
여성가장의 빈곤문제를 놓고 지금 당장 그들의 생계 지원을 외면할 순 없겠지만 근본적으로 빈곤의 여성화 현상을 방지하고 장기적으로 빈곤의 세습화를 단절할 수 있는 포괄적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할 때가 왔다.
hih@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