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란 놀이터에 산다..소설가 김형경 '성에'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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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형경씨(44)는 언젠가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생물학자나 과학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현미경이나 비커를 갖고 놀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요즘도 진화생물학 동물행동학 등의 과학서적을 즐겨 읽는다.
김씨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 '성에'(푸른숲)는 참나무의 바람,새까지 화자로 내세운 작가의 생물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폭설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강원도의 외딴집에 찾아든 연희와 세중은 뜻밖에도 3구의 시체를 발견한다.
꼼짝없이 시체 옆에서 지내게 된 이들은 처음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섹스에 탐닉하지만 갈수록 가학과 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음의 욕망으로 치닫는다.
소설은 이들의 기괴하고 섬뜩한 이야기와 함께 시체 3구의 사연이 또다른 줄기로 전개된다.
외딴집의 시체 3구는 세계일주를 꿈꾸며 북에서 남으로 귀순한 '남자',돈과 스위트홈을 꿈꾸는 '사내',이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여자'다.
이들은 한 부부처럼 뒤엉켜 살면서도 따스한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믿는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여자가 임신을 하면서 이들의 균형은 깨지고 결국 참혹한 파국을 맞는다.
이미 주검이 된 이들 세 사람의 이야기를 작가는 참나무 박새 청설모 바람 등이 목격담을 진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소설에 매달려 있던 지난 2년동안 매일 산에 오르며 산의 마음을 느껴보려 애쓰는 와중에 이런 방식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기적인 욕망을 쫓는 권력구조로 짜여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따스한 곳이라는 환상을 갖고 살지요.
이번 작품의 주제는 바로 이 환상입니다"라고 말한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