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혼돈속에서도 배울 것은 있다..文正仁 <연세대 정외과 교수>

탄핵 정국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증폭되고 있다. 탄핵의 사유도 납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절차상 하자마저 노정시킨 탄핵소추안의 국회 가결은 분명히 다수의 횡포이자 의회 민주주의의 좌절이라 평가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번 탄핵 정국을 부정적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절호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역사의 후퇴가 아니라 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는 민주주의 공고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완성하기 위한 과도기적 진통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단선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과거 권위주의 세력과 새로운 민주화 세력이 중층적으로 혼재해 있는 한국과 같은 정치 구도에서는 더욱 그렇다. 개혁의 도전과 수구의 응전이 빚어낸 예측불허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 변화는 과도기적 혼미와 진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번 탄핵 정국을 보다 긍정적 시각에서 관전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정치학습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다른 것은 정치 행위자들이 부단한 학습과정을 통해 과거의 실패와 과오를 반성, 교정하고 민의에 부응하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번 사태가 대통령에게 주는 교훈은 민주주의 체제하의 어떠한 행정수반도 의회와 정당 정치를 간과하거나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의회와 야당은 투쟁과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의 대상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대통령의 대 국회 및 야당관에 본질적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야당과 입법부도 자성해야 한다. 탄핵소추권은 국가의 대승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같은 헌법 정신을 망각하고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탄핵소추라는 극약 처방을 한 야당의 처사는 수용하기 어렵다. 입법부도 권한 남용시 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진실을 새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탄핵 정국은 민주주의 요체로서의 삼권 분립의 가시화라는 순기능적 결과를 가져왔다 하겠다. 제왕적 대통령이 군림해온 한국에서 사법부의 역할은 극히 제한돼 왔다. 이번 탄핵소추의 향방은 9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달려 있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사법부 역할이 이처럼 중차대해 본적은 없다. 한국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번 탄핵 정국이 풀뿌리 참여정치를 성숙시켰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여러 정치 스캔들 때문에 정치적 냉소로 일관해 오던 시민들이 '찬탄' 과 '반탄' 의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거리로 나와 평화적 시위를 한다는 것은 국론 분열의 징표가 아니다. 이는 한국에 참여 민주주의 정치가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탄핵 정국은 국민의 직접 참여를 통한 '시민사회의 힘'이 공식 제도권인 '정치사회'에 미치는 순기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역사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르지만 이러한 새로운 정치참여 양상은 선거 혁명을 통한 한국 정치의 대전환을 예고해 주고 있다. 지난 며칠 사이에 롤러 코스터처럼 급변하고 있는 정당별 지지도가 이를 반영해 주고 있다. 그 만큼 정치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 변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 역시 한층 고조되고 있다. 이번 탄핵소추는 분명 한국의 헌정사에 불미스러운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낡은 정치가 청산되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단절되는 동시에 보다 투명한 정치 문화가 자리 잡아 민주적 공고화가 가속화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제 동요하지 말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자.그리고 그 판결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cimoon@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