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먹고살기 급한데 이념논쟁 할 땐가..柳東吉 <숭실대 명예교수>

柳東吉 총선 전 "선거를 왜 하느냐"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질문이 황당했던지 한참 후에야 나온 답이 "탄핵심판"이었다. "탄핵사태가 없었다면 선거는 안 해도 되는 거냐"고 다시 물었다. 대학생들이 답변하기에는 유치했지만 "국회의원 선출하기 위해서"라는 답이 나왔다. 다시 "국회의원 뽑아서 뭘 하자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있었고, 다시 "정치를 잘 한다는 게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말꼬리잡기를 계속하다가 이른 결론은 "선거도 정치도 국민을 잘먹고 잘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뻔한 이야기인데 이걸 대학생들이 몰라서 바로 답하지 않은 게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서 갈라진 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다. 경제발전의 역사적 사실은 더이상 경제체제 논쟁의 무의미함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총선이 끝나자 민노당의 국회진출 때문인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각기 당 안에서 이념논쟁·노선논쟁을 벌였다.중도진보 중도보수 개혁보수라는 개념이 애매한 말들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한 클릭 왼쪽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주소는 어딘가. 캄캄한 터널속이다.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대만 말레이시아는 물론 중국 인도에도 뒤졌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는 불안한 노사관계, 부실한 대학교육, 비효율적인 정부, 경제과제에 대한 정치권의 이해부족 등이 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건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경쟁력 침체나 1995년 국민소득 1만달러 고지에 오른 후 8년째 제자리에 맴돌고 있는 건 무엇 때문인가. 이념과 노선정립이 안 됐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틀을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때때로 감지된다. 성장주장은 기득권 층의 수구논리고, 분배주장은 개혁의지의 표출이라는 착각도 우리 사회에는 존재한다. 분배가 아무리 중요해도 성장 없는 분배가 가능하지 않다는 건 이미 역사적 경험이자 교훈이다. 개혁은 어느 계층 또는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개혁이란 먹고사는 문제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치우는 것이다. 그런 개혁을 해야한다. 내용도 방향도 분명하지 않은 정책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시도 때도 없이 발표되면 진짜 개혁은 물 건너간다. 개혁을 개혁해야할 상황이 되는 것이다. 경제문제만 잘 풀리면 국민이 잘먹고 잘사는 것은 아니다. 안보도 외교도 먹고사는 문제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17대 국회의원 당선자들 다수가 중국을 대외관계의 최우선에 놓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 긍정적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과연 그런가. 경제는 물론 외교·안보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하지만 친(親)중국정서가 반미(反美)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려할 일이다. 반미가 애국일 수는 없다. 재산도 소득도 없는 자, 일찍 직장을 쫓겨난 자, 신용불량자, 갈곳 없어 헤매는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아무리 찾아봐도 일자리 제공뿐이다. 국내기업은 중국 등지로 나간다. 국내에서는 견딜 수 없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지만 우선 버티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잘 나가던 수출도 중국쇼크에 영향을 받게 됐다. 미국의 금리인상 가능성도 한국경제에 부담이다. 원유가(原油價) 폭등은 한국경제에는 폭풍이나 다름없다. 경제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자금난을 겪는 중소기업은 쓰러지고,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기업은 투자를 꺼린다. 경쟁력은 떨어지고 성장잠재력은 잠식되고 있는데 제대로 정책적 대응도 못한다. 그러면서 이념논쟁을 벌이고 있는 게 오늘 우리 사회다. 시대착오적이고 소모적인 이런 논쟁을 벌일 여유가 있는가. 구체적 정책을 놓고 각 정당은 스스로 입장을 밝히면 될 일 아닌가. 좌로 가고 싶으면 그렇다고 밝히는 게 옳다. 애매하게 포장해서 국민을 현혹시킬 일이 아니다. 이념과 노선논쟁을 하며 소득 2만달러,동북아 경제중심을 노래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노래만 하다가 베짱이 신세 안 된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yood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