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삐삐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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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는 1920년대 초 탄생된 뒤 오랫동안 빠르고 대중적인 매체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 텔레비전이 선보였을 때 뉴욕타임스는 코웃음쳤다.
"라디오는 일하면서도 들을 수 있지만 TV는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미국인 중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예측은 빗나갔고 세상은 TV 천국이 됐다.
TV에 밀려 완전히 퇴출되는 듯하던 라디오는 그러나 작업장과 자동차라는 틈새시장을 확보,되살아났다.
공장과 고속도로 출근길의 동반자로 자리잡으면서 미국의 '테크놀로지 리뷰'(MIT 刊)가 선정한 '첨단 디지털IT·과학문명의 비약적 발전에도 사라지지 않을 10가지'에 포함됐다.
전자시계 등장 이후 역사유물이 될 뻔한 아날로그식 바늘시계 역시 '시간의 거리'를 느끼고픈 사람들에 의해 재등장했다.
새로운 기술 개발과 함께 사라질 것같던 옛기술이 새것에는 없는 영역을 인정받으면서 다시 뜬 경우거니와 이번엔 휴대전화의 출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줄 알았던 무선호출기(삐삐)가 부활 중이라는 소식이다.
삐삐는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때 가입자가 1천5백만명을 돌파했었지만 휴대전화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97년을 고비로 급감,5만명까지 줄었는데 지난 가을부터 이용자가 점증,최근엔 월 1천명가량씩 늘어난다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광고전화와 스팸메시지,비싼 통신비용에 질린 사람들이 값도 싸고 사생활 보호도 되고 응답할 전화만 하면 되는 삐삐를 찾는다는 얘기다.
기능이 향상돼 숫자 외에 문자 서비스도 가능해 기본료 8천원에 부가서비스 이용료(2천5백원)만 더하면 교통정보와 증권시세를 받아볼 수 있는 것도 삐삐 부활의 이유로 꼽힌다.
모든 기술엔 부작용이 따르고 따라서 따뜻한 휴머니즘이 빠진 기술의 생명은 길지 않다.
진화와 진보는 다르고 진화는 진보쪽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첨단기술이 늘어나고 빠른 생활을 요구받을수록 느리고 단출한 삶에 대한 소망은 커진다고 한다.
입는 컴퓨터,둘둘 마는 PC,몸속을 돌아다니는 나노컴퓨터가 나온다는 세상에서 삐삐가 과연 어느 정도 인기를 누릴지 궁금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