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꿈속에서 만난 스승님 .. 유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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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이런 자리에서 자네를 만나다니 반갑네.
그동안 꽤나 노력 많이 했더구만.
자네가 시를 쓴다고 해서 하는 말이네만 내 오랜만에 담백한 대접으로 마음이 훈훈해 한마디하고 갈 터이니 잘 새겨듣고 삶을 잘 경영하길 바라네.
'대저 우주는 나의 뿌리요 만물은 나의 몸이다.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오히려 쉬워지는 법,가장 가까운 것을 장악하는 사람이 가장 먼 것을 장악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요즈음은 많이 돌아다니지 못하지만 누구나 젊어 피 끓는 시절은 폭풍처럼 있느니 참 나도 봉두난발에 거친 곳을 여럿 들르면서 구박 깨나 받고 살았다네.
대체로 시인들은 쓸데없이 자기 현시욕이 강하고 남을 배려하지 못해.
겉모양이 남루하다고 문전박대 당하고 등에 굵은 소금세례를 받은 날도 많았지.
지붕 낮은 곳에서 허름한 일꾼들과 소주잔을 밤새 돌린 적도 있고, 오히려 거친 그들의 주름살 안창에 고여 있는 감자 속살 같은 마음 씀씀이에 눈물 젖곤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했다네.
자네,생각이 생각을 반성한다는 말 들어보았나.
내 이야기일세.
그리하여 참 부드럽고 아늑하고 겉보기에 풍성한 곳을 많이도 찾아다녔다네.
사근사근 혓바닥에 구르는 당의정처럼 독이 더 많이 들어있는 연애시의 마을,자기가 쓰고도 무슨 말을 썼는지 모르는 해독 불가능한 난해시의 패거리,요설과 장광설 하나로 포스트모던의 적자임을 강조하는 외국입양 못해 안달하는 아이 같은 모임,엄살과 광기로 얼룩진 반장들 동네,공식을 만들어놓고 언어를 조립하는 조립식 건축업자들의 단체,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도사풍의 시,주제만 너무 내세우다가 그 주장에 치어 저도 감당하지 못할 말을 주저리주저리 동어반복하는 사람들까지 수 없는 마을과 동네를 기웃거렸다네.
한때는 그 사람들과 들고나면서 만고풍상을 겪었지만 결국 문학이란 사람살이에서 오는 눈물겨움 아니던가.
잘 드러나지 않은 그늘의,배면에 깔려있는,생명 있는 것들의 안쓰러움 아니던가.
모시고 섬기는 일에 너무 인색해.
모두들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왜 자기 안에 절을 못 짓고 산으로 가는가.
왜 자기 집 안에 고산준령을 품고 강을 보듬어 바다를 끌어안을 생각을 못하고 떠나기만 하는가.
물론 각처시언(各處詩言)이고 각처시담(各處詩談)이니 기행시나 풍경시가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닐세.
풍화했으되 뼈는 남아있어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
밖에 나가서 찾다 찾다가 못 찾고 헤맨 끝에 스승께 물어보았더니 지금 당장 집으로 가 보거라, 맨발로 뛰어나와 반기는 사람이 바로 부처니라 했던.
일상의 작고 사소한 부분을 시에 담으면 좀팽이라고 무시하고 멀리 떠나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풍광을 노래하면 크고 장엄하다고 착각하는데,이것 참 큰 병폐 아닌가.
오래 전 중국의 어떤 천재 화가도 그랬다네.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이 귀신이었다고 말이야.
귀신을 본 사람이 별로 없으니 당연한 이치겠지.
그럼 무엇이 가장 그리기 어려우냐 물었더니 개나 말이라고 답하더래.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것들이라 자칫 잘못 그리면 욕먹는다고 말일세.
소인은 산으로 숨고 대인은 사람 속으로 스며든다는 말 자주 들었겠지.
그리하여 소소한 일상을 노래하는 작품이 가장 쓰기 어려우며 어려운 만큼 가장 크고 장엄한 노래일 수도 있다는 말일세.
자네의 최근 작품들을 읽어보니 일상의 작은 말씀들이 어떻게 우주적 발언의 차원으로 변해 가는 지 똑똑히 볼 수 있어 반가웠다네.
반성하는 자세도 마음에 들었고.
반성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굳어 쓸모가 없다네.
따끈따끈할 때 꿇어야지.
자네가 즐겨 가서 노는 나무를 닮게나.
나무를 쓰다듬고 있는 흙을 닮게나.
세상 모든 만물을 떠받들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닮게나.
이제 앞으로 자네에게 들를 때에는 봉두난발이나 도포자락 다 벗어 던지고 자네 누님이나 아내,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날 터인즉 맘 변하지 말고 지금처럼 반겨 맞아주게나.
자,그럼 그만 일어서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