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용서 .. 정명희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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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당시 우리는 키 순서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나는 키가 작았지만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키가 커서 뒷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맨 뒷줄 친구에게 부탁하여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곳에서 앞,옆자리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나는 어느날 마침내 영어시간에 선생님께 지적을 당하고 말았다.
앞으로 나오라는 선생님의 호통에도 난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나갈 필요가 없다는 친구들의 응원에 힘을 얻어 계속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화가 치민 선생님은 내 자리까지 달려오셔서 안나올 테냐 하시면서 내 귀를 잡아당겼다.
아차,아프다고 느끼기도 전에 이미 한 쪽 귀가 찢어진 것이었다.
하얀 여름 교복 위로 시뻘건 피가 흐르더니만 교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엉엉 울어버린 나를 반장이 얼른 외과병원으로 데리고 갔고,네 바늘을 꿰매고 돌아왔다.
교복은 친구가 세탁소에 맡겼고,난 의무실에 누워 모처럼의 휴식을 즐겼다.
영어 선생님은 어찌할 바를 모르셨고,빵과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찾아오신 담임선생님은 어머니가 걱정하실 테니 청소하다가 못에 찔렸다고 말씀드리라고 했다.
그럭저럭 넘어갈 것 같던 그 일은 며칠 후 큰 사건이 되고 말았다.
거짓말하고 나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내가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실토한 것이다.
어머니가 그날 당장 학교로 오시겠다고 하셨다.
담임 선생님께 알리니 걱정이 되시는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오히려 내게 물으셨다.
난 우리 어머니는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빌면 바로 용서해주실 거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어머니가 교무실에 나타나자마자 바로 사죄를 하셨고,어머니는 "정말 잘못하셨지요?" 하시고는 더 이상 아무 말씀 없이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날 단체로 수업을 거부하며 공분했던 반 친구들을 달래느라고 한참 애를 먹긴 했지만 '귀 찢어진 아이'로 일약 스타가 되었던 에피소드다.
문제와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간의 잘잘못과 그 경중을 따지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때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무조건적인 사죄와 용서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 당시 선생님과 어머니가 보여주신 사죄와 용서.물론 그것이 문제를 푸는 가장 옳은 방법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내겐 여태껏 그분들의 행동이 어른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