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안창호 우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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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1902년 10월이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품팔이를 떠난 최초의 이민자들보다는 3개월 앞선 시기였다.
24세의 늦깎이 청년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고 2년 후에는 신학강습소로 옮겨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국내 정세는 그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고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되어갔던 것이다.
도산은 현지에서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섰고,미국언론을 상대로 우리나라의 실상을 알리는데도 주력했다.
당시 미 시사주간지 '네이션'에는 '한국인의 호소'라는 도산의 글이 실렸는데 이에 동조한 미국인들이 1만2천6백달러라는 적지않은 성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미국 체류기간중 도산의 가장 큰 업적은 흥사단을 설립한 일이다.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급선무라는 취지아래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7명의 대표들과 함께 창단식을 가진 것이다.
행사장소는 샌프란시스코였지만 모든 구상과 작업은 도산이 거주하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근교 리버사이드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도산은 비록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미국인들이 도산에 대해 갖는 관심은 각별하다.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갈등과 반목을 일삼던 미주 한인들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결과적으로 이들이 미국사회에 기여하게 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전 미 연방하원이 만장일치로 로스앤젤레스의 한 우체국을 '도산 안창호 우체국'으로 명명키로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지난해에는 한국이민 1백년을 기념해 로스앤젤레스 남부를 관통하는 지점에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유학길 선상에서 석양녘에 우뚝 솟은 외로운 섬 하와이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해 '도산(島山)'이라고 호를 지었다는 안창호 선생은 "우리 중에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왜 자신이 인물될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꾸짖곤 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책인 듯도 하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