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남자 주부

HP의 칼리 피오리나 회장 남편은 과거 같은 회사 임원이었지만 그녀가 승승장구하자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면서 아내를 지원한다고 한다.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주인공은 무능하다는 이유로 이혼당한 뒤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여장한 채 가정부로 취직,애들을 돌보고 요리하고 청소한다.전자는 성공한 아내를 돕기 위해 주부를 자처한 이른바 '트로피 남편'이고 후자는 직장을 잃고 주부로 나선 경우다.

국내에서 남자주부가 화제로 등장한 건 2000년 방송된 MBC드라마 '아줌마'에서 이렇다할 직업이 없는 박재하가 대학교수인 한지원에게 아이 키우고 살림하겠다며 구혼하면서부터.

남자주부는 2002년 KBS1TV 일일극 '사랑은 이런 거야'에서 좀더 구체화된다.출판사에 다니다 나온 차상범이란 인물로 "내 손만 가면 뭐든 풍성해진다"며 살림을 도맡는 것.MBC '앞집 여자'의 이봉섭은 은행에서 퇴출된 뒤 미용실 원장인 아내 대신 밥하고 빨래한다.

현실에서도 가사를 돌보는 남자들이 부쩍 늘어난다는 소식이다.

통계청 조사 결과 올 1∼6월 집안일을 하는 남자 수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23.7%나 늘었다는 것이다.자의든 타의든,좋아서 하든 억지로 하든 남자주부의 처지는 수월하지 않아 보인다.

드라마 속이지만 상범은 아버지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봉섭은 아내에게 기가 죽어 산다.

평일 낮 집에 있는 남자는 전화를 제대로 못받는다는 얘기도 떠돈다.그러나 사람마다 하고 싶은 일,잘할 수 있는 일이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2001년 4월 여성부와 한국여성개발원이 유엔개발계획(UNDP)과 공동으로 평가한 전업주부의 월평균 가사노동 가치는 85만6천∼1백2만6천원이었다.

가사도우미를 쓰면 이보다 훨씬 더 들거니와 육아 등을 감안하면 실질적 가치는 돈으로 셈하기 어렵다.

남자주부가 힘든 건 남의 눈 탓도 있겠지만 '남자는 밖에서 돈 벌고 살림은 여자가 한다'는 성역할에 대한 편견과 그에 따른 자격지심 때문일 확률이 높다.아이를 키우고 아내의 출근을 도우면서 한결 행복해진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남녀 모두 성역할의 굴레에서 벗어나 살림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때도 된 것 아닐까.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