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6)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사장‥나를 막진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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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법(朴贊法ㆍ59) 아시아나항공 사장에게 CEO가 된 비결을 물었다.
"비결은 없고 이유는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그는 63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시고 후기대학인 경희대에 들어갔다.
학벌과 학연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갑절은 더 일을 했다.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다보니 CEO 자리까지 오르게 되더라는 것이다.박 사장은 종합상사 출신이다.
배재고(12회), 경희대 정외과를 거쳐 69년 11월 (주)금호에 입사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슬로건 아래서 20년간 수출전선을 누볐다.활달하고 담이 컸던 그에게 사람 만나고 물건 파는 일은 잘 어울렸다.
처음엔 타이어를 취급했지만 나중엔 농가에서 나오는 볏짚 머리를 일본에 수출하고 서양에서 '몽크피시(monkfish)'라고 부르는 아귀도 프랑스에 내다파는 등 안팔아본 것이 없었다.
젊은날의 대부분은 중동시장에서 보냈다.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 겪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75년 국제박람회 참석을 위해 이란에 갔다가 본사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바이어가 철근 1만t을 구매하겠다고 하니 그를 만나 계약을 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 비자가 없었다는 것.
새로 비자를 받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낙담해서 호텔로 돌아와 잘 알지도 못하는 프런트 직원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뜻밖에도 사우디 항공사 기장과 줄이 닿게 해주었다.
일단 무비자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간 기착지인 리야드에서 불법 입국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제다를 거쳐 베이루트로 갈 예정이어서 비자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고 우겼다.
우여곡절 끝에 바이어를 만나 2천5백만달러짜리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번에는 사우디를 어떻게 빠져나오느냐가 문제였다.
여권을 되찾으려고 시도하다가 다시 철창신세를 지고 말았다.
사우디 경찰도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소식을 들은 바이어가 사우디 외무부에 선처를 부탁해 베이루트로 강제출국 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베이루트 얘기가 나오자 박 사장은 "거기서는 참 끔찍했다"고 말했다.
70년대 후반 중화학제품을 팔기 위해 레바논에 출장갔을 때의 일.
베이루트 시내에선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현지 주재원과 식사를 하기 위해 영국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얼큰한 음식이 생각나 길 건너 스페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프를 막 떠먹으려는 순간,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로 눈앞에 있던 영국식당이 통째로 날아갔다.
폭탄 테러였다.
한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던 순간이었다.
베이루트 공항에서의 총격도 잊을 수 없다.
회교 민병대가 계류장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 항공기와 승객을 납치한 뒤 공항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납작 엎드려 있는 박 사장의 머리 위로 총탄이 빗발치고 유혈이 낭자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리만치 고지식했지요. 아마 그 시절의 저는 불가능을 몰랐거나 아니면 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젊고 유능한 상사맨에게 유혹이 없었을 수 없다.
중동붐이 불면서 저마다 중동에서 대박을 꿈꾸던 시절에 그는 재력가들의 집중적인 '러브콜'을 받았다.
영어 경험 인맥의 3박자를 다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차려 사장을 시켜줄테니 같이 일하자는 제안들이 쏟아졌다.
박 사장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안면 있는 해외 바이어들을 끼고 독립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큰 돈을 벌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큰 기업에서 착실하게 일해 보드(이사회)멤버가 되는 것이 훨씬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박 사장도 상사맨이 된 것을 딱 한번 후회한 적이 있다.
80년 시멘트 공장을 수출하려고 인도의 라지스탄(펀자브 서쪽의 사막지대)을 찾았을 때의 일.
승용차를 빌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 광산과 현장 입지조건 등을 조사하다가 석양 무렵에야 일이 끝났다.
사막의 밤은 갑자기 찾아왔다.
천지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길을 잃었다.
새벽이 오고 날이 밝아도 여전히 미로속을 헤매고 있었다.
누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오아시스는 흔적도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무려 30시간을 헤맨 끝에 낙타를 타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 사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적도에서 가장 가깝다는 그 사막의 별빛은 너무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박 사장은 열사의 모래먼지에 뒤덮여 녹초가 돼버렸다.
시멘트 공장 수출건도 무산됐다.
맥이 탁 풀린 박 사장은 호텔방에 누워 끙끙 앓았다.
괴로운 밤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그를 홍콩지점장으로 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재충전하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81년 말에는 최대 시장인 미주 영업을 맡았다.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갔다.
18박19일 동안 무려 10개국을 방문하는 강행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항공사 CEO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88년 창립된 아시아나항공은 90년 국제선의 본격적인 영업을 앞두고 국제감각을 갖춘 영업통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박 사장은 그해 1월 아시아나항공 영업 상무라는 직함을 받아들었다.
후발 항공사의 영업은 힘들었다.
브랜드는 취약했고 사람들은 의심이 많았다.
경쟁사들은 겉으로 선의의 경쟁을 다짐했지만 돌아서면 등 뒤에 비수를 겨눴다.
92년 뉴욕 취항을 앞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대리점망을 구축했다.
뉴욕 교민시장의 과반을 점유하고 있는 5개 메이저 여행사와 접촉해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취항이 임박한 어느날, 여행사들이 갑자기 계약 취소를 통보해 왔다.
어찌된 일인지 짐작가는 데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박 사장은 심야회의를 열어 5개 메이저들을 포기하고 중소 여행사들을 아시아나의 단독 여행사로 키워가기로 결정했다.
신생 항공사와 중소 여행사의 결합은 처음에 처량하고 초라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나가 '기내 마술시범' '외투보관' '원두막 수박 돌리기' 등의 새로운 기내 서비스를 잇따라 선보이는 동안 중소 여행사들도 발로 뛰며 시장을 열었다.
새 비행기를 앞세우고 들어온 아시아나에 교민들도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출전선이나 영업전선이나 전선은 '전선(戰線)'이다.
그곳에도 화약냄새 가득한 총성과 포연이 있다.
박 사장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저없이 적진에 돌진했고 열심히 싸웠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늘 다시 털고 일어섰다.
박 사장은 36년의 직장생활을 견뎌온 힘을 '서울대 낙방'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서울대 낙방생이 어디 한 둘인가.
그는 신입사원들에게 이렇게 '진심'을 얘기하고 있다."지난 세월은 온통 성취와 보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날 저를 만든 자양분은 바로 일이었습니다. 하고 싶다는 열정, 하겠다는 의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떠한 도전도 아름답습니다."
조일훈ㆍ류시훈 기자 jih@hankyung.com
"비결은 없고 이유는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그는 63년 서울대 경영학과에 지원했으나 고배를 마시고 후기대학인 경희대에 들어갔다.
학벌과 학연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갑절은 더 일을 했다.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다보니 CEO 자리까지 오르게 되더라는 것이다.박 사장은 종합상사 출신이다.
배재고(12회), 경희대 정외과를 거쳐 69년 11월 (주)금호에 입사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슬로건 아래서 20년간 수출전선을 누볐다.활달하고 담이 컸던 그에게 사람 만나고 물건 파는 일은 잘 어울렸다.
처음엔 타이어를 취급했지만 나중엔 농가에서 나오는 볏짚 머리를 일본에 수출하고 서양에서 '몽크피시(monkfish)'라고 부르는 아귀도 프랑스에 내다파는 등 안팔아본 것이 없었다.
젊은날의 대부분은 중동시장에서 보냈다.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 겪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75년 국제박람회 참석을 위해 이란에 갔다가 본사로부터 한 통의 전문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바이어가 철근 1만t을 구매하겠다고 하니 그를 만나 계약을 체결하라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사우디아라비아 비자가 없었다는 것.
새로 비자를 받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낙담해서 호텔로 돌아와 잘 알지도 못하는 프런트 직원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뜻밖에도 사우디 항공사 기장과 줄이 닿게 해주었다.
일단 무비자 상태로 비행기를 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간 기착지인 리야드에서 불법 입국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제다를 거쳐 베이루트로 갈 예정이어서 비자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고 우겼다.
우여곡절 끝에 바이어를 만나 2천5백만달러짜리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번에는 사우디를 어떻게 빠져나오느냐가 문제였다.
여권을 되찾으려고 시도하다가 다시 철창신세를 지고 말았다.
사우디 경찰도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소식을 들은 바이어가 사우디 외무부에 선처를 부탁해 베이루트로 강제출국 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베이루트 얘기가 나오자 박 사장은 "거기서는 참 끔찍했다"고 말했다.
70년대 후반 중화학제품을 팔기 위해 레바논에 출장갔을 때의 일.
베이루트 시내에선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 민병대가 교전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었다.
현지 주재원과 식사를 하기 위해 영국 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얼큰한 음식이 생각나 길 건너 스페인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프를 막 떠먹으려는 순간,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바로 눈앞에 있던 영국식당이 통째로 날아갔다.
폭탄 테러였다.
한순간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가르던 순간이었다.
베이루트 공항에서의 총격도 잊을 수 없다.
회교 민병대가 계류장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 항공기와 승객을 납치한 뒤 공항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납작 엎드려 있는 박 사장의 머리 위로 총탄이 빗발치고 유혈이 낭자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리만치 고지식했지요. 아마 그 시절의 저는 불가능을 몰랐거나 아니면 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젊고 유능한 상사맨에게 유혹이 없었을 수 없다.
중동붐이 불면서 저마다 중동에서 대박을 꿈꾸던 시절에 그는 재력가들의 집중적인 '러브콜'을 받았다.
영어 경험 인맥의 3박자를 다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차려 사장을 시켜줄테니 같이 일하자는 제안들이 쏟아졌다.
박 사장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안면 있는 해외 바이어들을 끼고 독립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큰 돈을 벌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큰 기업에서 착실하게 일해 보드(이사회)멤버가 되는 것이 훨씬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박 사장도 상사맨이 된 것을 딱 한번 후회한 적이 있다.
80년 시멘트 공장을 수출하려고 인도의 라지스탄(펀자브 서쪽의 사막지대)을 찾았을 때의 일.
승용차를 빌려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 광산과 현장 입지조건 등을 조사하다가 석양 무렵에야 일이 끝났다.
사막의 밤은 갑자기 찾아왔다.
천지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길을 잃었다.
새벽이 오고 날이 밝아도 여전히 미로속을 헤매고 있었다.
누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오아시스는 흔적도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무려 30시간을 헤맨 끝에 낙타를 타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나 사막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적도에서 가장 가깝다는 그 사막의 별빛은 너무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박 사장은 열사의 모래먼지에 뒤덮여 녹초가 돼버렸다.
시멘트 공장 수출건도 무산됐다.
맥이 탁 풀린 박 사장은 호텔방에 누워 끙끙 앓았다.
괴로운 밤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그를 홍콩지점장으로 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재충전하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81년 말에는 최대 시장인 미주 영업을 맡았다.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갔다.
18박19일 동안 무려 10개국을 방문하는 강행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항공사 CEO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88년 창립된 아시아나항공은 90년 국제선의 본격적인 영업을 앞두고 국제감각을 갖춘 영업통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박 사장은 그해 1월 아시아나항공 영업 상무라는 직함을 받아들었다.
후발 항공사의 영업은 힘들었다.
브랜드는 취약했고 사람들은 의심이 많았다.
경쟁사들은 겉으로 선의의 경쟁을 다짐했지만 돌아서면 등 뒤에 비수를 겨눴다.
92년 뉴욕 취항을 앞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대리점망을 구축했다.
뉴욕 교민시장의 과반을 점유하고 있는 5개 메이저 여행사와 접촉해 대리점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취항이 임박한 어느날, 여행사들이 갑자기 계약 취소를 통보해 왔다.
어찌된 일인지 짐작가는 데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박 사장은 심야회의를 열어 5개 메이저들을 포기하고 중소 여행사들을 아시아나의 단독 여행사로 키워가기로 결정했다.
신생 항공사와 중소 여행사의 결합은 처음에 처량하고 초라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아시아나가 '기내 마술시범' '외투보관' '원두막 수박 돌리기' 등의 새로운 기내 서비스를 잇따라 선보이는 동안 중소 여행사들도 발로 뛰며 시장을 열었다.
새 비행기를 앞세우고 들어온 아시아나에 교민들도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수출전선이나 영업전선이나 전선은 '전선(戰線)'이다.
그곳에도 화약냄새 가득한 총성과 포연이 있다.
박 사장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저없이 적진에 돌진했고 열심히 싸웠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나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늘 다시 털고 일어섰다.
박 사장은 36년의 직장생활을 견뎌온 힘을 '서울대 낙방'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서울대 낙방생이 어디 한 둘인가.
그는 신입사원들에게 이렇게 '진심'을 얘기하고 있다."지난 세월은 온통 성취와 보람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날 저를 만든 자양분은 바로 일이었습니다. 하고 싶다는 열정, 하겠다는 의지, 반드시 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어떠한 도전도 아름답습니다."
조일훈ㆍ류시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