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8) 이종희 대한항공 총괄사장 ‥ 조종사 선망

이종희(李鍾熙ㆍ62) 대한항공 총괄 사장은 부드러운 웃음과 푸근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소주라도 한잔 들이키면 금방 빨개질 것 같은 얼굴이다.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사람들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카리스마나 '독종'같은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사실은 1천8백일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일한 적이 있는 독종이지만).

지난 35년간의 회사생활을 자평해 달라는 요청에도 "실력이 없어 고생 깨나 했다"는 소박한 대답으로 털털 웃어넘겼다.

이 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경영자다.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항공외길을 달려왔다.

그의 역정은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지만 무수히 먼지나는 일상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준비는 치밀했으며 기회가 오면 결코 놓치지 않았다.이 사장은 대구상고와 단국대(경영학과)를 나왔다.

대구상고 시절부터 항공기 조종사를 선망했다.

시간이 나면 학교 뒷산에 누워 금속음을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쳐다보는게 일이었다.대구상고 동창인 이상윤 농심 사장은 "학창시절부터 종희는 항공사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성실했고 유난히 탐구욕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대학시절 '비행기 엔진의 백그라운드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공군을 지원했다.

근무지는 경기도 김포에 있던 공군 11전투비행단 정비소.

한 여름이면 섭씨 40도가 넘어가는 격납고 안에서 부품에 기름칠하고 나사 조이는 일을 반복했다.

"일개 공군 사병이 항공기 엔진을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했겠습니까. 단지 그 시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한 거지요."

단국대를 졸업한 뒤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항공산업의 장래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을 정도이니 그가 대한항공에 입사(69년)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故)조중훈 한진회장이 이끌던 한진상사는 그해 3월 공기업이던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으로 민영화시켰다.

이 사장은 26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첫 근무 부서는 기술부.경영학을 전공했음에도 기술부로 보내진 이유는 공군 정비소 경력 때문이었다.

당시 대한항공은 프로펠러 항공기 시대를 접고 DC9 같은 제트기를 도입하려던 참이었다.

해외에서 새로운 기술교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번역해 내부 교재로 만드는 것은 이 사장의 몫이었다.

군에서 항공기 부품 몇개 만져본 경험 밖에 없던 그가 최신 항공기의 기술체계를 손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실상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던 과거 대한항공공사 시절의 나이 많은 직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 사장은 여기저기 물어가며 부지런히 번역 작업을 했다.

71년 이 사장은 기술부에서 기획관리실로 근무지를 옮겼다.

구매와 자금조달 업무를 맡았다.

항공기 본체는 외국에서 수입하지만 통신장비 항법장비 주방 등의 내부시설은 따로 사들여야 했다.

항공기의 특성과 고객들의 취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더욱이 수입 항공기는 서양인들의 체형이나 기호에 맞게 설계돼 있었다.

"항공기의 전체 구조를 세밀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구매 업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옛날 교본들부터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자금조달 업무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

당시 자금조달은 곧 외자도입과 같은 말이었다.

항공기 구매를 위한 외자도입은 경제기획원의 승인 사항.

항공기 관련 영문자료들을 번역해 관청을 드나드는 날이 이어졌다.

공무원들은 깐깐했고 좀처럼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여기에다 미국수출입은행이 팩스로 보내온 '차관계약서'는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이 사장은 한국은행과 외환은행의 외화관련 직원들을 찾아 계약서를 보여주며 자문을 받곤 했다.

75년 부품수입을 하는 자재 겸 통관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주 반병밖에 마시지 못하는 주량이었지만 이 사장은 그 시절에 많은 술을 마셨다.

대한항공이 A300 등 대형 기종들을 속속 도입하면서 공항을 통해 반입되던 부품 물량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시절, 공항의 통관시스템은 제때 이를 처리해 주지 않았다.

고루한 정부의 통제시스템은 확장일로의 기업경영을 따라오지 못했다.

관료와 공항 당국자들은 각종 규정을 들어 곳곳에서 제동을 걸었고 이를 해결하는 일은 통관과장의 몫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어요. 참으로 답답합디다. 속이 터져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면 항상 통금 5분 전이었습니다."

이 사장은 78년 회사에서 가장 바쁜 자리라는 영업스케줄 과장이 됐다.

전 항공기의 운항일정을 짜고 조절하면서 항공기 운항지체와 정비 등의 운항 종합정보를 컨트롤 하는 자리였다.

쉽게 말해 항공사의 종합상황실장이었다.

요즘이야 전산시스템이 발달해 모든 정보가 컴퓨터로 24시간 통제되지만 당시에는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고생길이었다.

그때부터 83년까지 5년간 휴일을 포함해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사무실을 지켰다.

보고가 불가능한 한밤중에는 자신이 사장이었다.

혼자 판단해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과적으로 입사한 지 10여년 만에 기술-구매-자금-통관-운항 등의 업무를 다루는 모든 부서를 다 돌았다.

"정말 결사적으로 일했습니다. 항공사 업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준 회사 측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8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여객지점장(부장)으로 나가면서 영업 일선에도 본격 뛰어들었다.

LA 지점장은 항공사 영업의 꽃이다.

대한항공은 이 사장에게 그만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함께 교민들도 늘어나면서 탑승객들은 나날이 불어났다.

당시 최대 고민은 백인들이 탑승을 꺼린다는 것.

항공상품은 재고가 없고 이월도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사장은 비행기 좌석이 몇개라도 비어있으면 그 자리가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현지 여행사 딜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뛰는 영업을 했다.

몬도가네 스타일의 딜러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과 함께 몬도가네식 식사를 하기도 했다.

"저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차마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정말 별거 다 먹었어요.
그래도 완고한 백인 시장을 뚫는데는 한계가 있습디다."

그의 이같은 고민은 지난 2000년 대한항공이 스카이팀에 가입하면서 해소됐다.

같은 회원사였던 미국 델타항공이 대한항공을 적극 홍보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한항공이 델타를 통해 달성한 미주노선의 운항 매출은 7천만달러.

특히 서울~애틀랜타 구간은 델타가 50% 이상을 팔아줬다.

2000년 3월 여객영업본부장(부사장)으로 승진한 이후 회사내 중요한 태스크포스팀은 모조리 그의 차지였다.

신공항건설 운영위원장-스카이팀 운영위원장-서비스혁신 추진위원장-월드컵 본부장 등의 보조 직함들을 달고 지냈다.

그는 전문가라고 해서 한 업무에 오래 종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다.

모든 업무는 연결돼 있으며 자신의 영역에 스스로 칸막이를 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2003년 2월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국내 항공사의 전략적 제휴에 따른 인적자원 개발에 관한 실증연구'였다.

그 해에 그는 여객사업본부 사장으로 승진했다.

대구상고 시절 항공사 직원이 되겠다는 꿈은 40여년이 지나 글로벌 톱10을 바라보는 항공사의 최고경영자(대표이사) 타이틀과 박사학위를 안겨다 주었다.

꿈은 소박했으되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치밀한 준비와 전략적 사고, 묵묵히 한 우물을 파고들었던 인내의 결실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