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15) 이구택 포스코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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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역 플랫폼에,봄을 시샘하는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969년 3월2일 밤 11시.카바이트 등불을 매단 노점상 리어카에서 냄비 우동 한 그릇을 급하게 비운 한 젊은이가 역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방인의 낯선 눈길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역전 모퉁이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깡마른 체구에 매달린 두개의 커다란 옷가방.아마도 잠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겉모양만 여관이지 사실은 여관이 아니었다.
당시 "중앙대학"이라고 불리던 포항역 주변의 홍등가였다.놀란 가슴으로 황급히 빠져나와 시발(始發)택시를 불렀다.
차창 밖으로 적막에 쌓인 포항시내의 밤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미군 군용차량을 개조해 만든 택시가 한참을 덜덜거리며 달려가 내려준 곳은 "상주여관".당시 포항에 있던 두개의 여관중 하나였다."여관방에 누워 생각하니 한심합디다. 포항과의 첫대면이 홍등가였다는 것도 그렇고…,내일이면 첫 출근이라는 기쁨에 앞서 이 '깡촌'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나 싶더라구요."
하지만 다음날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에 자리잡은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현장에는 더 기가 막힌 모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과 맞닿은 3백50만평의 부지는 온통 모래뻘이었다.사진에서 봐온 하얀 백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준설(浚渫)을 위해 파 올린 진흙 모래들이 볼썽사납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35년전 포항종합제철 첫 출근 길에 나선 이구택(李龜澤·58) 포스코 회장이 맞닥뜨린 풍경이다.
포철 창립멤버이자 대학시절(서울대 금속공학과) 스승인 윤동석 교수(93년 작고)의 권유로 입사하긴 했지만 첫 눈에도 '이건 아니다'싶을 정도였다.
"철강을 지배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그런데 과연 이런 곳에서 철이 나올까?"
하지만 이 회장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만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거센 모래바람과의 싸움을 견뎌야 했다.
바람이 한번 불면 누런 모래들이 순식간에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현장에 갈 때는 분명히 있었던 길이 돌아올 때는 없어지기 일쑤였다.
지프에는 길을 내기위한 삽이 늘 실려있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이 회장의 일상을 깨운 것은 언젠가 밤 일을 마치고 현장 직원들과 쓴 소주를 마실 때였다.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별다른 꿈이 없다면 이곳에 당신의 꿈을 묻어.우리는 모두 한가지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야.척박한 이 땅에 공장을 세워 뜨거운 쇳물을 뽑아내는 게 바로 우리 모두의 꿈이지.한 사람이 꾸는 꿈은 이뤄지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의 꿈은 이뤄지는 법이야."
이 회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거창한 슬로건보다,철강대국이라는 비현실적인 수사보다도 훨씬 가슴 뭉클한 얘기였다.
수습을 마치고 첫 배치를 받은 곳은 서울 본사의 기획관리부.당시 부장은 90년대초 포철 회장을 지낸 황경로씨(74)였다.
70년10월 착공에 들어가 72년8월 준공된 열연공장 사업계획을 짜는 일을 맡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던 현장과 네트워크형 조직인 본사를 연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단단하고 빈틈이 없었던 일처리 덕분에 일찌감치 윗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71년 추석 때는 명절 쇠러 귀향한 근로자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내려갔다.
하루 평균 5백㎥에 이르던 콘크리트 타설량을 7백㎥로 늘리라는 당시 박태준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낮에 뙤약볕 아래서 작업을 하고나면 밤에는 바닷가의 극성스런 모기떼에 시달렸다.
어쩌다 동료가 권한 소주잔에 취해 파도 잔잔한 백사장의 그림같은 고요를 감상할라 치면 5분도 지나지 않아 레미콘을 가득 실은 트럭의 굉음이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그 땐 정말 힘들데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남들은 다 집에서 송편에 술한잔씩 나누고 있을 때 공사판에서 소주 잔 기울이는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72년2월,다시 포항 현장의 엔지니어로 복귀한 이 회장은 열연공장 기술계에 배치됐다.
사무실 창틀과 책상 위로 밤새 들이친 모래먼지를 치우는 일이 변함없는 일과의 시작이었다.
현장 인근의 민가에서 합숙을 하던 이 회장은 그 시절 총각 사원들이 그랬듯이 속옷과 양말을 제대로 갈아입기 힘들었다.
합숙소는 모래바람에 젖은 땀냄새와 오래된 음식냄새들이 뒤엉켜 항상 퀘퀘했다.
"저는 '부선망 독자(父先亡 獨子)' 규정에 따라 군대를 면제받았습니다. 제가 입사한지 3년 정도가 지나자 병역을 마친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하게 됐지요. 제가 그 친구들에게 뭐라 한지 아세요?'야! 여기는 사람 살데 못되니 절대로 오지말라'고 했어요"
6·25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청상(靑孀)이 돼 홀로 1남2녀를 키운 모친 허순씨(81)는 이 회장을 일찍 장가보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포항은 미혼여성들이 시집오기를 꺼리는 '깡촌'이었다.
결국 입사한지 7년이 지난 76년에야 이정란씨(51)와 '중매 반,연애 반'으로 만나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맞선요? 한 열댓번 봤지요. 아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참한 아가씨를 만나 가슴 설렌 적도 있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하지만 근무지가 포항이라는 이유로 딱지를 맞았지요. 그래서 저를 구제해준 집사람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
77년 열연기술과장이 된 뒤 1년쯤 지나자 석유시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미국 휴스턴 지사로 발령이 났다.
1년6개월의 짧은 체제기간이었지만 나름대로 해외영업에 눈을 뜬 이 회장은 80년5월 귀국해 수출부를 지원했다.
"본격적으로 영업을 해보고 싶다"는 요청에 박태준 사장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 사장은 이미 그를 미래의 CEO감으로 점찍어둔 상태였다고 한다.
수출을 대행하던 종합상사들을 끼고 시장조사와 지역전략을 수립하는 일을 맡았다.
이 회장은 항상 유연하고 여유가 있었다.
승부처에서는 돌진할 줄도 알았다.
81년 수출부 차장때의 일화.나중에 상공부장관을 지냈던 당시 안병화 판매담당 부사장(73)에게 보고를 잘못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성질이 불같았던 안 부사장의 질책은 비서가 내온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30분쯤 지났을까,문득 커피가 아깝다고 느낀 이 회장이 무심코 커피잔을 입에 갖다댔다.
그러자 안 부사장은 더 화가 났다.
"야! XXX,너는 욕 먹으면서도 커피 생각이 나냐…."
수출부에서 보낸 5년은 포철이 세계 시장을 향해 본격적인 비상을 하던 시기였다.
이 회장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앞날은 순탄대로였다.
86년 경영정책부장이 돼 회사 전반의 전략을 컨트롤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어 88년엔 이사로 승진해 3년여간 신사업본부장을 맡았다.
전·현직을 통틀어 이 회장만큼 다양한 부서를 섭렵해본 사람은 없다.
94년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자리인 제철소장이 됐다.
"공대를 나와 제철소장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제가 CEO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평생 마실 술의 대부분을 그 시절 마셨다.
현장의 주임 반장들과 어울려 이제는 말끔하게 단장된 도로와 화단들을 바라보며 옛날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중천에 이글거리던 태양과 눈을 못뜨게 했던 모래바람,그리고 방파제도 없던 해안가를 들이치던 집채같은 파도들을….그리고 또 그 시절의 꿈과 청춘을 얘기했다.
그는 CEO로서 갖춰야할 최고의 덕목으로 주저없이 역사의식을 꼽았다.35년전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섰던 뭇 젊은이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견인차였다면 지금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다.
글=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
이방인의 낯선 눈길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역전 모퉁이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깡마른 체구에 매달린 두개의 커다란 옷가방.아마도 잠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겉모양만 여관이지 사실은 여관이 아니었다.
당시 "중앙대학"이라고 불리던 포항역 주변의 홍등가였다.놀란 가슴으로 황급히 빠져나와 시발(始發)택시를 불렀다.
차창 밖으로 적막에 쌓인 포항시내의 밤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미군 군용차량을 개조해 만든 택시가 한참을 덜덜거리며 달려가 내려준 곳은 "상주여관".당시 포항에 있던 두개의 여관중 하나였다."여관방에 누워 생각하니 한심합디다. 포항과의 첫대면이 홍등가였다는 것도 그렇고…,내일이면 첫 출근이라는 기쁨에 앞서 이 '깡촌'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나 싶더라구요."
하지만 다음날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에 자리잡은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현장에는 더 기가 막힌 모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과 맞닿은 3백50만평의 부지는 온통 모래뻘이었다.사진에서 봐온 하얀 백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준설(浚渫)을 위해 파 올린 진흙 모래들이 볼썽사납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35년전 포항종합제철 첫 출근 길에 나선 이구택(李龜澤·58) 포스코 회장이 맞닥뜨린 풍경이다.
포철 창립멤버이자 대학시절(서울대 금속공학과) 스승인 윤동석 교수(93년 작고)의 권유로 입사하긴 했지만 첫 눈에도 '이건 아니다'싶을 정도였다.
"철강을 지배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그런데 과연 이런 곳에서 철이 나올까?"
하지만 이 회장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만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거센 모래바람과의 싸움을 견뎌야 했다.
바람이 한번 불면 누런 모래들이 순식간에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현장에 갈 때는 분명히 있었던 길이 돌아올 때는 없어지기 일쑤였다.
지프에는 길을 내기위한 삽이 늘 실려있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이 회장의 일상을 깨운 것은 언젠가 밤 일을 마치고 현장 직원들과 쓴 소주를 마실 때였다.
누군가 꿈이 뭐냐고 물었다.
이 회장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별다른 꿈이 없다면 이곳에 당신의 꿈을 묻어.우리는 모두 한가지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야.척박한 이 땅에 공장을 세워 뜨거운 쇳물을 뽑아내는 게 바로 우리 모두의 꿈이지.한 사람이 꾸는 꿈은 이뤄지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의 꿈은 이뤄지는 법이야."
이 회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거창한 슬로건보다,철강대국이라는 비현실적인 수사보다도 훨씬 가슴 뭉클한 얘기였다.
수습을 마치고 첫 배치를 받은 곳은 서울 본사의 기획관리부.당시 부장은 90년대초 포철 회장을 지낸 황경로씨(74)였다.
70년10월 착공에 들어가 72년8월 준공된 열연공장 사업계획을 짜는 일을 맡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던 현장과 네트워크형 조직인 본사를 연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단단하고 빈틈이 없었던 일처리 덕분에 일찌감치 윗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71년 추석 때는 명절 쇠러 귀향한 근로자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내려갔다.
하루 평균 5백㎥에 이르던 콘크리트 타설량을 7백㎥로 늘리라는 당시 박태준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낮에 뙤약볕 아래서 작업을 하고나면 밤에는 바닷가의 극성스런 모기떼에 시달렸다.
어쩌다 동료가 권한 소주잔에 취해 파도 잔잔한 백사장의 그림같은 고요를 감상할라 치면 5분도 지나지 않아 레미콘을 가득 실은 트럭의 굉음이 들려오던 시절이었다.
"그 땐 정말 힘들데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남들은 다 집에서 송편에 술한잔씩 나누고 있을 때 공사판에서 소주 잔 기울이는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72년2월,다시 포항 현장의 엔지니어로 복귀한 이 회장은 열연공장 기술계에 배치됐다.
사무실 창틀과 책상 위로 밤새 들이친 모래먼지를 치우는 일이 변함없는 일과의 시작이었다.
현장 인근의 민가에서 합숙을 하던 이 회장은 그 시절 총각 사원들이 그랬듯이 속옷과 양말을 제대로 갈아입기 힘들었다.
합숙소는 모래바람에 젖은 땀냄새와 오래된 음식냄새들이 뒤엉켜 항상 퀘퀘했다.
"저는 '부선망 독자(父先亡 獨子)' 규정에 따라 군대를 면제받았습니다. 제가 입사한지 3년 정도가 지나자 병역을 마친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하게 됐지요. 제가 그 친구들에게 뭐라 한지 아세요?'야! 여기는 사람 살데 못되니 절대로 오지말라'고 했어요"
6·25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청상(靑孀)이 돼 홀로 1남2녀를 키운 모친 허순씨(81)는 이 회장을 일찍 장가보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포항은 미혼여성들이 시집오기를 꺼리는 '깡촌'이었다.
결국 입사한지 7년이 지난 76년에야 이정란씨(51)와 '중매 반,연애 반'으로 만나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맞선요? 한 열댓번 봤지요. 아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참한 아가씨를 만나 가슴 설렌 적도 있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하지만 근무지가 포항이라는 이유로 딱지를 맞았지요. 그래서 저를 구제해준 집사람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
77년 열연기술과장이 된 뒤 1년쯤 지나자 석유시추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미국 휴스턴 지사로 발령이 났다.
1년6개월의 짧은 체제기간이었지만 나름대로 해외영업에 눈을 뜬 이 회장은 80년5월 귀국해 수출부를 지원했다.
"본격적으로 영업을 해보고 싶다"는 요청에 박태준 사장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 사장은 이미 그를 미래의 CEO감으로 점찍어둔 상태였다고 한다.
수출을 대행하던 종합상사들을 끼고 시장조사와 지역전략을 수립하는 일을 맡았다.
이 회장은 항상 유연하고 여유가 있었다.
승부처에서는 돌진할 줄도 알았다.
81년 수출부 차장때의 일화.나중에 상공부장관을 지냈던 당시 안병화 판매담당 부사장(73)에게 보고를 잘못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성질이 불같았던 안 부사장의 질책은 비서가 내온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30분쯤 지났을까,문득 커피가 아깝다고 느낀 이 회장이 무심코 커피잔을 입에 갖다댔다.
그러자 안 부사장은 더 화가 났다.
"야! XXX,너는 욕 먹으면서도 커피 생각이 나냐…."
수출부에서 보낸 5년은 포철이 세계 시장을 향해 본격적인 비상을 하던 시기였다.
이 회장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앞날은 순탄대로였다.
86년 경영정책부장이 돼 회사 전반의 전략을 컨트롤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어 88년엔 이사로 승진해 3년여간 신사업본부장을 맡았다.
전·현직을 통틀어 이 회장만큼 다양한 부서를 섭렵해본 사람은 없다.
94년 엔지니어로서 최고의 자리인 제철소장이 됐다.
"공대를 나와 제철소장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제가 CEO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평생 마실 술의 대부분을 그 시절 마셨다.
현장의 주임 반장들과 어울려 이제는 말끔하게 단장된 도로와 화단들을 바라보며 옛날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중천에 이글거리던 태양과 눈을 못뜨게 했던 모래바람,그리고 방파제도 없던 해안가를 들이치던 집채같은 파도들을….그리고 또 그 시절의 꿈과 청춘을 얘기했다.
그는 CEO로서 갖춰야할 최고의 덕목으로 주저없이 역사의식을 꼽았다.35년전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섰던 뭇 젊은이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견인차였다면 지금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다.
글=조일훈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