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공기업의 뒷거래' 유감

"농협을 사이에 두고 외국 은행들과 파생상품 계약을 하면 외자 10억달러에 대한 이자 수입을 그냥 얻을 수 있습니다." 5일 검찰이 발표한 KTX∼농협∼외국계 은행간 파생금융상품 비리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외국계 모은행 황모 상무는 지난해 한국철도시설공단(KTX:당시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자금과장 정모씨에게 이 같은 '달콤한' 말로 접근했다. 황 상무가 설계한 상품의 골자는 KTX가 농협을 매개로 외국 은행들로부터 매년 원금의 6.25% 이자를 지급받고 6년 후 달러당 엔화 환율이 79.8엔 아래로 떨어질 경우에만 KTX가 그로부터 4년반 동안 외국계 은행에 일정금액의 엔화를 지급하는 것. 황 상무는 "현재 엔·달러 환율이 1백엔 이상이고 한 번도 80엔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어 79.8엔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없다"며 KTX 관계자들을 안심시킨 후 편의를 봐달라는 대가로 정 과장과 그 결재라인에 있는 재무본부 소속 임원 등 모두 4명에게 각각 2천만원에서 2억원씩을 건넸다. 당시는 일정이 앞당겨진 고속철도 개통 기일을 맞추기 위해 KTX 직원 모두가 정신없던 때였다. 이처럼 중요한 때에 이들 4명은 모 외국계 은행 임원으로부터 뒷돈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됐던 것이다. 그것도 달러강세에 대비,외자 10억달러에 대한 환리스크를 관리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엔·달러 환율변동에 대한 리스크를 떠안은 '위험한 게임'에 뛰어든 대가였다. 물론 KTX 입장에서는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79.8엔 밑으로 내려갈 확률은 없다고 보고 이런 계약을 체결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계약에 노련한 외국계 은행들은 반대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고 상품을 설계한 것이었다. 실제 국내 환율 전문가들도 향후 6∼7년 후면 달러당 엔화가 79엔선으로 내려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KTX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향후 엔·달러 환율 변동에 대한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는 결과를 낳게 됐다. 검찰에 구속된 이들은 뇌물혐의 등에 대해 벌만 받으면 되지만 국민의 세금을 볼모로 위험한 '게임'을 한 공기업 직원들의 더 큰 죄과는 10년 후 우리 국민 모두가 감내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정인설 사회부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