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스크린쿼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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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炳鎰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외환위기 타개책의 하나로 제안한 한·미'투자협정'(BIT) 협상과정에서 논란거리로 부각된 스크린쿼터(현재 1년의 40%로 규정된 극장별 연간 한국 영화 의무상영일수)는 21세기에 와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더욱 기세등등해진 신문화세력과 시민단체들은 스크린쿼터 축소는 친미세력의 음모라고 공세를 펴고 있다.
"미국과 BIT를 체결한 나라치고 나라 꼴이 제대로 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미국과의 BIT는 투기자본에 국내시장을 송두리째 내주는 꼴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맞는 말이다.선진국 가운데 미국과 BIT를 체결한 나라는 없다.모두가 극빈 개도국이거나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국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BIT가 필요한 이유는 투자국이 상대국의 불확실한 정치상황이나 경제제도 및 운영방식 때문에 자국민들의 투자가 불이익을 받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투자유치국은 BIT가 체결되면 자국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을 완화시키고 대외신인도를 제고시킬 수 있게 된다.
정치체제가 안정돼 있고 자본주의 제도가 별안간 전복될 가능성이 희박한 국가들끼리는 시간과 돈을 쓰면서 굳이 BIT협상을 할 필요가 없다.
투기자본으로 말하자면, 이미 한국에 들어올 투기자본은 다 들어왔고 들어올 수 있게 돼있다.국내 주식시장에서 가장 큰손은 외국투자자들이고,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들은 외국인 지분이 내국인보다 더 많다.
심각한 불경기,북한의 핵 위협,정치지도력의 실종,투자부진,기업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경제정책, 대규모 청년실업 등….작금의 한국경제 상황이 1998년 우리의 필요에 따라 제안했던 BIT를 굳이 체결하지 않아도 좋은 태평성세라고 장담할 수 있나?
그러면 한국영화는 여전히 스크린쿼터를 필요로 하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는 그들의 논리는 바뀌고 있다. 2001년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40%를 상회하고 축소요구에 직면하자 그들은 "한번 40%를 초과했다는 것만으론 경쟁력이 생겼다고 할 수 없다"고 하더니, 그 이후 4년 연속 50%대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자 이제는 "일부 대박영화 이외에 한국영화는 적자투성이"라고 한다.
그러면 스크린쿼터제를 연간 40%에서 더 확대하란 말인가? 극장주와 소비자들이 모든 한국영화의 흥행을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몇몇 대박 터뜨리는 국산영화에 가려 소자본, 작가적 영화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영화내에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가 존재하고 만약 그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합의가 있다 하더라도 스크린쿼터가 그 해결책은 분명히 아니다.
스크린쿼터제도로도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문화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는 직접적 세제혜택, 보조금 지급, 전용관 건립 등의 다양한 정책 대안 논의가 시급하다.
"스크린쿼터 아니면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식의 교조적인 집착은 스크린쿼터로 다른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술수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영화외의 문화산업은 모두 개방과 경쟁을 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다양성 있는 발전을 하고 있는데 전체 문화산업의 지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한 영화산업만은 왜 예외적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더구나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이 결국은 방송, 게임, 음반, 애니메이션 등 영상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늦추게 돼 스크린쿼터 고수론자들이 지키려 하는 시청각 산업 주도력을 상실하게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가장 중요한 투자국이자 교역상대국인 미국과의 BIT는 국내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정부가 방향감각은 제대로 잡아가고 있구나 하는 신호를 국내외에 천명하는 셈이 될 것이다.
정부는 우유부단하게 결정의 시기를 놓치지 말고 개방과 글로벌 환경에 걸맞은 방향으로 스크린쿼터 문제를 해결하길 기대한다.
"한·미 BIT는 초국적자본의 이윤추구를 부추기고 한국문화를 미국에 종속시키는 친미관료들의 음모"라는 그들의 편협한 이분법이 아직도 이 땅에서 통용된다면 그것은 21세기 한국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