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22) 정진구 CJ 식품서비스 총괄 대표

외식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하는 정진구(鄭鎭九-59) CJ 식품서비스군 총괄 대표의 스토리는 나환자들과 같이 먹고자며 뒹굴던 사회초년병 시절의 얘기로부터 시작된다. 1972년의 일이다. 삼립식품 구매부 신입사원이던 그는 계란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나환자 촌에 직접 뛰어들었다. 당시 삼립식품의 주력제품은 계란을 주원료로 하는 카스테라.소비자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나 봄 가을 소풍철만 어김없이 재연되는 "계란파동" 으로 원료 확보에 애를먹었다. 소위 4대 메이저로 불리던 남대문과 동대문의 계란 도매상들이 값을 올리기위해 교묘하게 출하량을 조정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대형 양계장들이 널려있지만 그 때는 국내 계란 공급의 70%를 경북 안동,칠곡 등에 산재한 나환자촌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방법은 그들과의 직거래를 트는 것 밖에 없었다. 정 대표는 짐을 싸들고 나환자 촌으로 내려갔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지만 그는 업무보고를 위해 서울에 올라오는 기간을 빼고는 나환자들과 같이 지냈다. 손가락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 목욕도 시켜주고 밤에는 함께 소주도 마셨다. 잔 한개로 돌아가며 마시는 나환자촌 특유의 주법(酒法)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상거래의 가장 큰 밑천은 신뢰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환자들은 서울 도매상들과의 거래를 일부 끊으면서까지 삼립식품이 직거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어요." 회사는 중간마진이 붙지 않은 싼 가격에 계란을 구매해 성수기에도 공장을 풀가동할 수 있게됐지만 그는 무시무시한 협박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왔어요. 저 때문에 장사를 망친 계란 도매상들이지요. 한동안은 그들이 몰려있는 남대문 동대문 등을 피해다녀야 했습니다." 2003년말 부터 CJ그룹 식품서비스군을 총괄하고 있는 정진구 대표. 국내 대기업 CEO 가운데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삼립식품에 몸담았던 2년9개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다국적 식품기업에서 대부분의 직장생활을 보냈다. 한때는 고달픈 이민자로서 미국 편의점의 말단 점원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그의 꿈은 농사꾼이었다. 삼미사 부회장을 지냈고 평소 농사에 관심이 많던 부친 정용모씨(81년 작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서울 사대부고를 졸업한 뒤 65년 서울대 농학과에 진학했고 71년6월 삼립식품에 취업을 한 것도 농사와 식품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이었다. 실제 정 대표가 군복무를 마쳤을 때는 부친이 과천 일대에 상당한 규모의 농지와 과수원 터를 매입해둔 상태였다. 74년3월 그는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형식만 '이민'이지 선진식품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학군장교(ROTC 7기)로 근무했던 부대가 미 1군단의 작전지시를 받아 일명 '보리 카투사'라고 불리던 공병대대 였어요. 그곳에서 기름지고 맛깔난 미군 식단을 들여다보며 서방 식품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지요." 단돈 2백달러를 들고 부인과 함께 정착한 곳은 미국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무작정 떠난 이민이니 먹고 살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US Gypsum'이라는 조그만 건축자재 생산회사에 공정 관리인으로 취직을 했다. 하루 3교대로 돌아가는 공정의 단계별 생산성을 체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연봉 3만달러의 수준급 일자리 였지만 76년6월 회사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그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종업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집 근처의 24시간 편의점인 '세븐 일레븐'을 들어갔다. 세븐 일레븐의 보수는 시간당 3달러.전 직장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로 적었다. 반면 업무는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로 더없이 고된 일이었다. 그는 매장에 비치돼 있는 편의점 운영 매뉴얼을 달달 외운 뒤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과거 나환자촌과의 계란 직거래를 성사시켰던 때처럼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 3교대 근무에 일일 보고가 하나밖에 없다는 문제점이 맨 먼저 눈에 띄었다. 각 근무 교대자들이 올리는 매출의 합계와 실제 금고에 들어있는 돈이 매일 달랐다. 정 대표는 금전등록기를 들여놓을 것을 제안했다. 매출이 발생할 때마다 금전등록기에 입력을 하고 이를 토대로 시간대별 매출 합계를 기록토록 했다. 볼티모어의 작은 편의점에 들여놓은 금전등록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내 6천8백개의 전 점포에 확산됐다. 정 대표는 점원 생활 4개월만에 부점장으로 승진했다. 부점장이 되고나서도 그의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밤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노트에 빼곡하게 썼다. 정 대표는 강도 예방법에 대한 매뉴얼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당시 전국 세븐 일레븐에는 하루평균 1.5건의 강도사고가 발생하고 있었다. 정 대표는 신제품 선전물로 가득차 있는 점포 겉유리 포스터들 중 계산대 앞의 포스트는 없애야한다고 생각했다. 점포 밖에서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또 20달러 이상의 지폐는 받지 않는다는 공고문을 외부에 써붙여한다고 주장했다. 현금 계산기에 돈이 많지 않으면 강도들이 '범죄'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어느날 본사의 워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사장이 손님으로 가장해 암행 감찰을 나왔다가 정 대표의 노트를 보게 됐다. 그 길로 정 대표의 '강도 예방법'은 미국 전역에 전파됐고 그는 6개월만에 점장으로 다시 올라섰다. 점장 생활을 한지 6년쯤 지나 그는 마침내 세븐 일레븐 본사의 간부가 됐다. 텍사스주내 8개 점포를 관리하는 매니저가 된 것. 그는 완전히 미국 생활에 적응한 것 같았다. 본인에겐 안된 얘기지만 77년말 자신의 터전이라고 생각했던 과천의 농지는 종합청사부지로 수용당해 돌아갈 땅도 없었다. 귀국의 꿈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85년.미국의 아이스크림 전문브랜드인 배스킨 라빈스는 한국 진출을 앞두고 마케팅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배스킨 라빈스 코리아의 총괄이사로 85년8월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오랜만에 밟아본 고국 땅의 감회를 즐길 틈도 없이 곧장 배스킨 라빈스의 한국시장 연착륙에 매달렸다. 86년8월 충북 음성에 공장을 세우고 1백% 천연재료를 이용해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94년까지 전국에 1백개의 점포를 내며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정 대표의 다음 직장은 파파이스였다. 파파이스는 세븐 일레븐과 배스킨 라빈스를 거치며 이미 미국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정 대표를 아시아 총괄 CEO로 영입했다. 만 5년만에 전국에 1백50개의 점포를 내며 선발주자였던 KFC 버커킹 등에 바짝 따라붙었다. 그는 서울에 고작 2명의 직원을 데리고 움직였지만 아시아권 내 점포 개설과 운영에 대한 영향력은 말 그대로 '언터처블'이었다. 다국적 브랜드인 스타벅스 코리아 사장을 맡고나서도 그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2002년말 그만둘 때까지 60개 점포를 열며 국내 커피숍 시장을 석권했다. 그는 어느새 신규 브랜드 런칭의 천재로 불리고 있었다. "나보다 연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경영자를 모셔오라"는 이재현 회장의 특명을 받아 외식사업의 헤게모니 장악을 꿈꾸던 CJ가 그를 영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 대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연봉 3만달러를 받던 전문 직장인에서 시간당 3달러짜리 점원으로의 변신도 마다하지 않았다. 헛된 공상으로 보내기 쉬운 한밤중의 조그만 가게에서 스스로 문제점과 개선책을 찾아 세계 최대 편의점의 운영 매뉴얼을 바꿔놓았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을 홀로 치밀하게 준비해 이뤄냈다. 평범한 이민자의 삶을 거부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제 세계 식품시장을 향해 도전장을 던진 국내 토종기업 CJ푸드빌의 대표 자리다. 6년전 위암 수술을 받아 많이 여윈 몸이지만 서울 강남의 뚜레쥬르 매장에서 만난 그의 눈빛만은 형형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