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뺄셈리더십' '덧셈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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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孝鍾
같은 일을 해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긍정과 부정의 방식이다.
선생님이 시험지를 보고 "세 개씩이나 틀렸구나"하면 학생은 영락없이 기가 죽는다.
반대로 "세 개밖에 안틀렸구나"하면 용기백배한다.
또 의사도 "당신은 과거에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서 고생 좀 할거요"하면 환자는 기가 죽는다.
그러나 "오죽하면 그렇게 골초가 되었겠소만, 담배를 줄이면 병이 나을거요"하면 희망을 갖는다.
이처럼 정부도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왜 잘못했느냐며 몰아세움으로써 기를 꺾어놓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최선을 다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고칠 것은 고치자며 기를 북돋우는 방식이다.
지금 노무현 정부는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가.
또 그 리더십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리더십인가.
노무현 정부는 한국의 누적된 반칙과 모순을 치유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과거사도 규명하고 보안법도 폐기하며 행정수도도 이전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정아젠다 설정방식이 '뺄셈방식'이라는데 있다.
과거사를 규명하는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과거사를 규명하는 일을 혁신아젠다로 정했다고 해도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기보다 과거의 '공적'을 발굴해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친일파를 찾아내 벌주기보다 항일운동에 매진한 독립투사들을 발굴해 그 공적을 선양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면 국민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지 않았을까.
이 시점에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독립유공자에게 보상하는 것으로 민족정기를 살린다면 덧셈리더십의 표상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도 마찬가지다.
국가보안법이 자연법이 아닌 이상 언제나 개폐논의는 할 수 있다.
하나 보안법의 과거 오·남용 사례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칼집에 칼을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고 하는 것은 '뺄셈식' 접근이다.
오히려 보안법이라는 칼을 칼집에 넣을 수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미래를 내다보고 폐기·개정을 논의하자며 '덧셈식' 접근을 했다면, 국가 원로들까지 나서서 폐기반대를 선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행정수도를 옮기는 일은 덧셈식인가.
'서울 죽이기'를 하기보다 '서울도 살고 지방도 사는', 이른바 '윈-윈 전략'을 구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서울의 삶의 질이 멕시코시티보다 나쁘다고 자책하면서 서울을 옮기겠다는 뺄셈식 국정운영 방식에, 서울사람들이 기가 막혀 격앙돼 있는 것이다.
경제는 어떤가.
'경제력 집중'이니 하며 '기업가 정신'을 옥죄며 한국의 기업가들을 '임상옥'보다는 '놀부'로 치부한다면 뺄셈식 방식이다.
한국 기업가 정신에 '청교도 정신'은 없지만,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단순히 '천민부자 정신'이라고 낙인찍는다면, 6·25전쟁 중에도 목숨을 걸고 기업활동을 한 기업가들을 모독하는 게 아닐까.
또 중동국가와 최초로 선박수출에 관한 상담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국기업의 조선능력을 반신반의하는 상대방에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만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설득한 기업가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이 나라'라는 '덧셈식 발언'을 멀리서 한번하기보다 국내에서 수십번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리더십이야말로 '통합의 덧셈예술'일 뿐, '분열의 뺄셈예술'은 아니다. 같은 말이라도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다.이제 추석이 지나 보름달도 하현달로 접어들고 있다.
앞으로 참여정부는 '반달'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것인가. 보름달에 미치지 못한 '못난 반달'로 치부할 것인가,아니면 초승달을 면한 '대견한 반달'로 평가할 것인가.
대통령의 TV발언에 즐거워하는 사람보다 격분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정치리더십은 영락없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수도 있는데,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진다면,
이런 황당한 '마이너스 정치'가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기를 살리는 리더십을 원하는 것이지,기를 죽이는 리더십을 원하지 않는다. 적대감과 회한, 분노가 서려있는 지도자의 말보다 애정과 아량, 배려가 배어있는 지도자의 말을 듣고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