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경쟁력을 높이자] <2> 협력하는 노사.."春鬪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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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강국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세계 최대 항구도시 로테르담.지난달 20일 이 곳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전체 근로자의 절반인 3만여명 노조원들이 정부의 연금 축소계획에 반대해 24시간 시한부 파업을 한 것.협력적 노사관계를 취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기자에게 파업소식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밍코 반헤이즌 로테르담항 홍보역은 의외로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였다.
"놀랄 필요 없다. 지난해 노사정이 합의한 2년간 임금동결에 따른 후속 협상에서 정부와의 이견으로 노조가 항의성 시위를 한 것일 뿐이다. 조만간 원만한 합의가 이뤄질 것이다."
내용을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부 및 사용자측과 노조간 쟁점은 조기은퇴 가능연령.현재 법정 정년이 65세인데,조기은퇴 가능연령으로 정부는 62.5세를 주장하고 노조는 62세로 맞서고 있다.
정부는 근로자들이 좀더 일을 하도록 해 퇴직연금 지급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고,노조는 가급적 일을 덜 하고 연금을 좀더 받겠다는 입장이다.
어쨌든 양측의 간극은 6개월에 불과해 절충과 타결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모(馬)아니면 도(豚)'식의 극한대결에 익숙한 한국 기자에겐 더욱 그랬다.
"네덜란드의 노사관계는 극과 극의 주장으로 벼랑 끝까지 치닫는 한국과는 다르다.
때론 파업이란 긴장도 있지만 서로 절충 가능한 대안을 내놓고 협상을 벌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해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곳에선 매년 봄 이뤄지는 기업의 노사협상을 '춘협(春協)'이라고 부른다.
한국처럼 춘투(春鬪)나 하투(夏鬪)란 말은 아예 없다."(엄근섭 주 네덜란드 한국대사)
노사의 이런 합리성은 '협상 결렬보다는 차선의 합의가 낫다'는 실용주의적 태도와 전통에서 비롯된다.
바로 그런 전통의 밑바탕엔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노사와 정부가 '사회적 협약'이란 대타협을 통해 고비를 넘겨온 지혜가 있다.
스웨덴의 경우 노동자와 기업주간 평화로운 협력에 관한 기본 약정인 '살트셰바덴 협약'(1938년)과 '성장협약'(1999년),핀란드엔 노·사·정이 노동시장 개혁과 실업축소를 약속한 '사회적 협약'(1995년)이 있다.
네덜란드에는 1982년 맺어진 '바세나르 협약'이 있다.
특히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은 눈여겨 볼 만하다.
네덜란드는 1970년대말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 직후 노조의 무리한 임금인상 요구와 실업 급증,방만한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고비용 고실업 적자재정의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에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 초 2차 오일쇼크까지 덮쳐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속 고물가)을 겪는다.
1982년 정권교체로 출범한 루트 루버스 연립내각은 이 위기극복의 돌파구를 노사 대타협에서 찾았다.
정부는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게 위기 극복의 첩경이라고 판단하고 노·사·정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서로가 손해보는 파국 보다는 한발씩 양보해 실익을 챙기는 게 낫다는 타협 정신이 발휘돼 전격 합의가 이뤄졌다.
"노·사·정 대타협엔 해수면 보다 낮은 국토를 간척하며 생존해온 네덜란드 사람들만의 강한 공동체 의식이 뒷받침됐다.
또 정부의 탁월한 조정력과 리더십도 한몫했다.루버스 내각은 과감한 경제개혁 의지를 분명히 하고 노사 협상을 압박했다.
예컨대 정부는 먼저 예산을 동결하고 노사합의 실패에 대비해 강력한 임금동결 방침을 발표했다."(구스예 돌스마 네덜란드 경영자연합회 노사관계 담당자)
당시 노조는 물가상승률 보다 1%포인트 낮은 수준에서 임금을 동결했다.
대신 기업들은 주당 근로시간을 40시간에서 38시간으로 줄여 기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장했다.
정부는 노와 사에 각각 소득세와 법인세를 깎아줘 고통을 덜어줬다.
"완전 승자도,완전 패자도 없는 합의였다.노·사·정 모두가 공동 승자라면 승자였다.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를 위기에서 건져냈을 뿐 아니라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도약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로베르트 반 스카근 네덜란드 경제부 대외경제협력국 부국장)
명분과 대결 보다는 실용과 상생을 추구하는 노사관계야말로 오늘날 유럽 강소국의 튼튼한 국가 경쟁력에 주춧돌이 된 셈이다.
로테르담·헤이그(네덜란드)=차병석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