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억새축제
입력
수정
'내가 사랑하는 것 죄다/아파하는 것 죄다/슬퍼하는 것 죄다/바람인 것 죄다/강물인 것 죄다/노을인 것 죄다/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 죄다/죄다 죄다 죄다/너는 버리고 있구나/흰 머리 물들일 줄도 모르고/빈 하늘만 이고 서 있구나/돌아가는 길/내다보고 있구나.'(이근배 작 '억새')
억새는 가을을 부른다.
늦더위가 가시고 문득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 억새의 계절이 시작된다.
억새는 벼과의 여러해살이풀.누가 심지 않아도 나고 자라 가을이면 산과 들판을 뒤덮는다.
나무의 든든함도,꽃의 화려함도 없지만 하늘과 바람 밖에 없는 황량한 빈 땅에 은빛 파도처럼 일렁이며 누웠다 일어나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TV드라마나 영화에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나 붉은 노을 아래 펼쳐진 억새밭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실제 '대장금'의 한상궁이 죽기 직전 장금의 등에 업혀 "니 능력은 뛰어난데 있는 게 아니라 쉬지 않고 가는데 있다"고 말하는 곳도,'연풍연가'의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는 곳도 억새 무성한 산등성이다.
가을을 맞아 제주도 한라산과 강원도 정선 민둥산 등 곳곳에서 억새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7∼16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내 하늘공원에서도 '억새 축제'가 마련된다는 소식이다.
하늘공원 가득 억새 물결이 넘치는 것을 기념,평소와 달리 밤 10시까지 개방하고 음악회와 가을편지 쓰기같은 행사도 연다고 한다.
하늘공원은 쓰레기 매립지로 90년대 후반까지 악취가 풍기던 난지도 꼭대기에 마련된 3만평 평원이다.
자연의 신비와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는 곳인 셈.월드컵공원 쪽에서 지그재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보이는 건 하늘과 발 아래 굽이치는 한강,저멀리 그림자를 떨구는 북한산 뿐이다.
시야는 탁 트여 있고 공기는 맑다.
축제기간엔 밤에도 연다니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끼리 찾아 밀려드는 어둠 속 보라빛 노을 아래 나부끼는 억새밭 사이를 걸으며 바람소리도 듣고,어디론가 돌아가는 새와 반짝이는 강물도 바라보면 잠시나마 고단한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는 힘에 가슴속 상처가 치유될 지도 모르고.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