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경제, 40년 세월의 彼岸

金秉柱 타임머신을 타고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거듭 거슬러 1960년대 중반으로 되돌아가보자. 요즘 우리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세대가 갓 태어났을 무렵이다. 60년대 중반 국내총생산(GDP)은 1조원을 크게 밑도는 7천여억원,1인당 국민소득은 1백달러를 갓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주로 섬유제품을 내다팔아 수출은 연간 고작 3억달러를 밑돌았다. 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층이었고 해마다 실업자가 부지기수였고 가을걷이 식량이 떨어지는 봄이면 아사자가 속출했다. 인구 태반의 일터인 농림어업부문이 GDP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번듯한 기업과 변변한 공장이 없었다. 전화와 흑백TV가 있는 '부잣집'은 동네의 모임터였다. 아파트는 아직 뜨악한 주거양식이었다. 국제적으로는 최빈국 대열 밑바닥에 있었다. 한국 경제의 요즘 모습은 어떠한가? 지난 2003년 GDP는 7백21조3천4백60억원,1인당 국민소득 1만2천6백46달러,수출 1천9백38억달러에 이르렀다. 그간의 높은 물가상승을 감안하더라도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이다. 경제규모와 대외교역규모 측면에서 세계 바닥권에서 12위 안팎의 자리로 발돋움했다.반도체 휴대전화 제철 조선 자동차 등에 있어 세계굴지의 생산·수출기지가 됐다. 반면 농림어업부문의 취업인구와 부가가치 기여도가 8%와 4% 이하로 줄어들었다. 과소비를 우려했던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에야 보급되기 시작한 컬러TV가 인기 주거양식으로 둔갑한 아파트 가가호호에 설치됨에 따라 이웃간 모임이 사라졌다. 인터넷 보급이 세계정상,휴대폰 전화보급도 최상급이다. 춘투·하투 등 노사분규가 일년내내 이어진다. 부존자원이 절대 부족한 한국이 이처럼 엄청난 경제사회의 지각변동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하고 근면한 인적자원과 대외지향적 개발전략 때문이었다. 자녀교육을 중시하는 학부모, 학문의 수월성 추구를 허용·장려했던 경쟁적 교육풍토, 직장내 교육훈련 등이 밑거름이 됐다. 군사정변 초기 대내지향적이던 정부가 대외지향으로 눈을 돌려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책지원이 주효했다. 브레튼 우즈 체계하에서 미국 등 선진국시장이 개도국 수출품에 호의적으로 개방돼 있었고, 다행하게도 1960∼70년대에는 오늘날의 BRICs를 비롯한 다수의 개도국 경제가 사회주의적 족쇄에 얽매여 있었기에 수출 드라이브가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어려움을 위기라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한다. 한국경제는 언제 위기 아닌적이 없었다. 70년대 이후만 따져도 두어차례의 석유파동,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외환부족위기를 한·일 경협, 중동 진출 등으로 어렵사리 극복해왔다. 과거에는 주로 해외발 위기였기에 민간부문과 정부가 합심해 대처하기에 용이했다. 오늘날 경제 질환은 그 원인이 내생적이며, 경제주체들 따로, 정부 따로 움직이고 있기에 치유하기 어렵다. 60년대 출생인구 대다수는 기존사회의 용광로에 용해돼 유용한 철골재로 성장해 경제의 주류에 합류했다.용해를 거부한 비주류는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자라다 현재의 권력핵심에 합류기회를 포착해 주류 위에 군림하게 됐다. 주류의 국민들은 군사독재에 찬동해서가 아니라 직장을 잡고 먹고 살기 위해 나라 안팎에서 열심히 뛰었다. 40년전 옹색했던 국내기업들 가운데 '포천 500 세계기업'에 오르는 반가운 사례가 생기고 있지만,국내의 반기업정서는 그들을 푸대접한다. 고용확대 조세납부 등 기업 본연의 기능에 추가해 분배성향의 사회적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가 재계의 기업의욕을 꺾고 있다. 팽배한 평등주의가 학교교육을 초토화시켜 수재를 둔재로 키우듯이, 정부와 일부 NGO들은 우수한 기업들 발목 잡고 늘어져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킨다. 누가 40년전 회귀를 갈망하는 기업인을 나무랄 수 있는가? 그때는 배고픔이 늘 눈앞에 어른거리는 사람들에게 기업이 일자리를 주면 감지덕지했다. 잘 살아보자는 의욕에 국민이 뭉쳐있었다. 비록 독재치하였고 부패가 있었지만 기업인은 기업하기가 수월했다. 전쟁 기억이 아직 생생해 국가 안보에 틈새가 없었다. 안보를 허물고 경제 성장잠재력을 갉아 먹으며 그것을 개혁이라고 부르는 세력들이 아직 강보에 싸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