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한경] (박수진 기자의 심야인터뷰) 이헌재가 사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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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건 또 뭐야?"
지난 7월19일 오후 7시반께.
기자는 뜻밖의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재경부 공보관실 발(發).
"모 방송이 "이헌재 부총리가 청와대에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한 것은 사실무근"이라는 내용이었다.
만일 방송 내용이 사실이라면 나는 깨끗하게 물을 먹었다는 말이 된다.
아뿔싸! 기자실 분위기도 술렁였다.
부총리의 사의표명이라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한 후 정부내에서는 개혁원리주의와 시장주의자들간에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 부총리가 국민은행으로부터 부당한 자문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타던 시점이라 가능성이 없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코너로 몰린 이 부총리가 결국 손을 든 것인가..
곧바로 장관 집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바로 옆방 차관 집무실에선 김광림 차관과 몇몇 1급 간부들이 모여 뭔가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김 차관은 장관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지만 "그런 일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며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단순한 해프닝?
그러나 뭔가 찜찜했다.
직접 집으로 찾아가 보는 수 밖에..
데스크에게 상황을 보고한 후 후배 안재석 기자와 함께 한남동 부총리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부총리 얼굴 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취임초부터 개별 언론사와의 인터뷰는 사절이라고 공언한데다 사의표명 사실을 본인이 직접 언론에 확인하기도 그렇고..
"그래도 일단 처들어 가보자"
우려대로였다.
한남동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10시10분께.
차고 입구에서 핸드폰을 꾹꾹 눌렀다.
부인 진진숙 여사는 "저녁에 반주를 하고 들어오셨는데 지금은 주무시니까 내일 재경부에서 보세요"
장관 부인도 아무나 하나..
다시 전화했다.
"한경 기자가 밖에서 무한정 기다린다고만 전해주세요."
진 여사와 밀고 당기기를 대여섯 차례.
30여분이 훌쩍 지나갔다.
누가 이기나 한번만 더 해보자.
오기가 생겼다.
"기다려 보세요.제가 깨워볼께요"
저녁 반주로 얼굴이 불쾌해진 이 부총리의 얼굴을 보는 순간,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기운는 남아 있었지만 단단히 맘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이 부총리는 정치권내 개혁세력을 겨냥해 "그런 식으로 뒷다리를 잡아가지고 되겠느냐"
"요즘은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며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불만들을 쏟아냈다.
정부내 시장주의파와 개혁주의파 간의 골깊은 갈등관계가 여과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기자는 다음날 새벽 12시반까지 2시간 동안 손이 아프도록 이 부총리의 말을 받아 적었다.
이 기이한 심야 인터뷰는 하루가 지난 21일자에 한면을 털어 도배질됐다.
보도의 파장은 컸다.
평소 2중 3중의 복선을 깔고 얘기하는 스타일의 이 부총리가 전에 없는 직설적인 톤으로 개혁세력을 향해 칼날을 세운 데다,총선 후 경제팀 개편에 관한 논의가 나오던 민감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독자들도 다 아시는 그대로다.
청와대는 서둘러 이 부총리의 재신임을 확인하는 쪽으로 사태 진정에 나섰고 한층 목청을 높이던 개혁원리주의 세력은 잦아들었다.
경쟁 신문사의 동료 기자들로부터는 질투어린 핀잔(?)도 들었다.
"혼자 잘해보시오.아무튼 축하해 박형!"
그러나 사실은 혼자 한남동집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존경하는 캣처들,다시 말해 선배 기자들과 데스크는 내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리며 회사에서 나와 함께 긴장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정부 안의 갈등 구조를 정확히 읽어내고 면도날 처럼 파고드는 것은 "흐름"과 "현장"을 중시하는 한경 경제부의 전통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날 밤의 인터뷰는 잊지 못할 특종이 되었다.
이 심야 인터뷰가 나간 다음부턴 신문사를 막론하고 일만 터졌다 하면 장관이나 고위 관료 집에 몰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동료 기자들에겐 미안하게 됐고..
박수진 경제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