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한국의 성별 ‥ 최순자 <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장>

가끔 내가 대학교수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70년대 초 철학이나 역사학 같은 인문사회계열을 전공하고 싶었던 내가 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은 사회적 분위기나 여성의 지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의지 하나로 선택한 게임과도 같았다. 막연히 인문 사회계열 전공으로는 밥 먹고 살 수 없을 것 같아 현실적 대안으로 여학생들이 꺼리는 공학 분야를 택했다. 여성 지원자가 드문 분야여서 뭔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0대 소녀에게는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6백80명의 공과대학 입학생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으니까. 그러나 내 결정은 남녀 차별이 분명히 존재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잘 모르고 판단한 것임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공과대학의 유일한 여학생으로 졸업 때까지 외롭고 힘든 시간을 견뎌냈건만 70년대 중반 우리 사회는 공학을 전공한 여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간 곳이 중학교 교사였다. 1년 후 공업고등학교로 전직하면서 학생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무서운 여선생으로 변했다. 매로 남학생의 엉덩이를 때리다가 도망간 학생을 맨발로 교문 밖까지 뛰어나가 붙잡아 온 일화는 아직도 제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교사를 비하하는 남학생들의 소행에 독기로 응수한 무의식의 행동이 아니었나 싶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사회는 '여성상위시대''역차별' 등의 말이 오갈 정도로 남녀 평등의식이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사회는 여성들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아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맛보기나 들러리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령 입사원서나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거나 주민등록번호를 기입하는 것은 처음부터 성이 다름을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드러내는 일이다. 또 TV 뉴스에서 여성이 인터뷰할 때 나이가 소개되는 것도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차별을 나타내는 처사다. 미국 사회가 남녀평등의 롤 모델은 아니지만 위의 사례 중 어느 것도 찾아 볼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성이 다름을 나타내는 구조적 요소들을 없애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