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읽기'] 그린스펀과 슘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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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업가 정신을 높여주면서 금융 부실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문제를 어떻게 감독하는 게 좋으냐"는 윤 위원장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던 모양이다.
원론적 얘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린스펀이 기업가 정신을 말한 것이 달리 들리는 이유는 지금의 우리 금융 현실 때문일 것이다.
불황기일수록 금융의 그런 역할이 아쉬울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린스펀의 말을 들으니 슘페터가 생각난다.
자본주의 발전의 근본 동력은 기술혁신이고,기술혁신을 하려면 창의적 기업가가 많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슘페터는 공부만 한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1919년에는 오스트리아 재무부 장관을,1920년에는 민간 은행장을 했다.
그는 기술혁신은 기업가의 영웅적인 노력의 결과지만 여기에 소요되는 새로운 자금은 통상적 경제활동에서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은행의 신용에 의해 창출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신의 동반자로서 은행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나라 금융시스템은 어떤가.
이에 대한 답은 윤 위원장이 그린스펀 의장에게 물어본 것 자체로 짐작할 수 있다.
기업가 정신,기술혁신은 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변수들을 넘어 이렇게 다른 부문,다른 정책목표 또는 환경적 조건에 해당되는 변수들에 의해 정작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
정책적 조화가 필요하고 또 전체적 시각에서 볼 줄 알아야 하는 이유다.
금융만이 문제가 아니다.
요즘 말도 많은 출자총액제한제 등 공정법 개정안은 또 어떤가.
정부는 시장시스템 개혁이란 정책목표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지 몰라도 이는 또 다른 차원에서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혁신주도형 경제라는 정책목표를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
기업들이 도전하고 모험하고 싶은 분야를 자유롭게 선택할 너무도 당연한 권리가 방해받는다면 그 자체로 혁신주도형 경제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것이 또 있다.
경제학은 가정의 학문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다른 모든 변수들이 같다면'이라는 의미의 'Ceteris Paribus'가정이다.
예컨대 가격이 오르면(내리면) 수요가 줄어든다(늘어난다)는 수요곡선만 해도 그렇다.
소득,취향,미래에 대한 기대,대체재나 보완재 가격 등 다른 모든 변수들이 같다는 가정아래 해당 재화의 가격만이 변할 때의 얘기다.
따라서 다른 모든 변수들이 동시에 변해버리면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다.
경제학은 이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다 만들어 놨다.
어쨌든 금리정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재정정책이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면 경제이론 탓만 할 게 아니다.
가만 있으리라 가정했던 다른 변수들이 그럴 수밖에 없게끔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경제에 대한 분기전망을 내놓지 않았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그것도 솔직히 이해가 갈 만하다.
웬만한 변수는 그대로이고 일부 변수만 변하면 경제전망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생각지도 않은 외적 변수들이 마구 변해버리거나 새로 튀어나오는 상황에서의 전망이란 그야말로 무의미해지기 딱 좋다.
누구는 '개혁은 개혁이고,경제는 경제'라고 얘기하지만 세상은 그리 간단치 않다. 전혀 무관한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무엇이 정말 문제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다른 모든 변수들이나 조건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따져보는 일 같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