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함께 똑똑이'

엘리트란 '우수,정예,중추'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국어사전엔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돼 있다. 엘리트의 개념과 역할에 대한 이론은 다양하다. 경제·사회학자 파레토는 엘리트의 자격이나 요건은 변하지만 엘리트가 사회를 이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뛰어난 능력의 소수가 다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엘리트 이론은 지배계급의 세습을 은폐하려는 논리라고 반박했고,다원적 엘리트주의자들 또한 고전적 엘리트이론은 인간의 능력과 참여,책임에 대한 차등성을 전제로 하는데 이것은 부문별로 다른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진보와 발전의 방향으로 이끄는 건 창조적 소수"라고 밝혔다. 문명의 발전은 언제나 환경이라는 도전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전으로 이뤄지며 극복하기 힘든 난관에 적절히 대응하는 힘을 찾아내는 건 창조적 소수이고 이를 대중이 모방할 때 사회는 성장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반엘리트주의를 꼽았다는 소식이다. 반엘리트주의가 팽배하게 된 건 이른바 엘리트들이 창조적 소수의 몫을 다하지 못하고 눈앞의 성취에 급급했던 탓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식기반사회에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첨단기술을 창출할 고급인력의 양성은 미룰 수도,외면할 수도 없는 당면과제다. 이기적 엘리트들로 인한 폐해가 있었다고 해도 반엘리트주의와 왜곡된 평등개념 때문에 엘리트 교육을 거부하고 평준화에 매달리면 토인비가 지적한 역사의 2막(쇠퇴)으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게 아니라 지적 능력과 함께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고 사회의 이익을 중시하는 도덕성을 갖춘 엘리트를 배출하는 일이다. 출세주의에 빠져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홀로 똑똑이'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건강한 지성인의 기개를 지닌 '함께 똑똑이'를 키우는 진정한 엘리트교육의 활성화가 절실한 때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