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美 대선] 부시, 아버지 恨 풀며 16번째 '재선 대통령'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43대)이 미국 역사상 연임에 성공한 16번째 대통령이 됐다.


그의 인생은 41대 대통령인 부친 조지 H W 부시의 복사판이다.


부친을 따라 필립스아카데미고교와 예일대를 다녔고 텍사스주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대학 시절 상류층 모임 해골단과 델타카팔론입실론에 가입하고 야구를 했다는 것과 대통령 재직 중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침공한 것도 똑같다.
심지어 이름까지 비슷해 정치 능력과 권위가 부친만 못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늘 들었다.


그는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부모님들이 신경을 꺼줬으면 좋겠다.


내 주위에도 훌륭한 참모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불만을 얘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부친보다 화려한 정치 경력을 남기게 됐다.


아버지 부시는 1992년 대선 때 걸프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신예 빌 클린턴에게 두배 이상 뒤져 재선에 실패했다.


부시 대통령은 젊은 시절을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무책임한 방랑자와 같았다"고 공개적으로 회고한 적이 있다.
1976년 음주운전을 하다 면허정지를 당한 것이 큰 오점 중 하나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68년 공군에 예비역으로 입대,5년6개월 복무했다.


군 경력에 대해서는 텍사스주 하원의원이던 부친이 베트남 전쟁 징집을 막기 위해 낙하산 입대시켰다는 소문이 지금까지 따라다닌다.


1975년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덕분에 이후 미국 대통령 사상 유일한 MBA 소지자로 기록됐다.


76년 텍사스주 일대에서 인기 많기로 소문난 로라 웰치와 결혼하고 이듬해 다시 부친이 밟은 길을 따라 텍사스주에서 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17년 동안은 정치의 꿈을 잠시 접고 사업을 했다.


77년 부친의 지인들로 투자단을 구성해 석유가스 발굴업체 '부시탐사회사'를 차린 후 87년까지 석유 업체 사장으로 있었다.


이 시기 창업 자금 일부를 당시 부친의 사업 파트너였던 사우디아라비아 빈 라덴 가문에서 얻어다 쓴 것이 지금도 논란거리다.


89년에는 역시 부친 지인들의 자금을 동원해 텍사스 레인저스를 인수,야구단 구단주가 됐다.


사업가로 지낸 이 기간동안 그는 부인을 따라 독실한 감리교 신자가 되면서 술을 끊었는데 부시 자신은 이를 '신자로서 다시 태어났다'고 자부한다.


정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텍사스주 주지사에 당선된 94년부터다.


주지사 재직 시절 친화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으면서 인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98년에는 텍사스주 주지사 역사상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이 경력과 집안의 후광을 발판으로 2000년 대통령 선거에까지 출마한다.


그해 대선은 법정까지 가는 유례없는 접전이었으나 결국 앨 고어 민주당 상원의원을 누르고 43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당시 선거에서 부시가 내건 공약은 감세,종교 단체 기금 운용 제한 완화,극지방 석유탐사 허용 등이었으며 지금도 감세 제도의 혜택을 본 고소득층 및 기독교단체,에너지와 방산업체들은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 세력이다.


대통령 재직 중 보여준 개인적 신념과 정책 방향은 대단히 일관적이었다.


경제면에서는 분배보다 성장을 절대 우선시하고 친기업적 시장경제원칙을 고수해왔다.


사회 및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를 옹호하고 이슬람 세력에 적대적이며 미국으로의 이민을 제한한다.


그의 이런 고집은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비용대비 효과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001년 30년 전 구소련과 맺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제한 조약을 파기했고 에너지 및 제조업계에 대한 우대 조치로 교토협정을 부정해 이 협약을 비준한 다른 1백60여개국의 빈축과 환경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으며 유엔은 이후 이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