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데스크] '동해 회복'이 먼저다

중국과의 고구려 '소유권' 논쟁,친일(親日)잔재 청산 논란 등으로 국내가 어수선한 요즘,지난 주말 프랑스 파리에서는 또다른 역사토론이 벌어졌다. 한반도 동쪽과 일본열도 사이에 놓인 바다 이름으로 '동해'가 맞느냐,'일본해'가 합당하느냐를 두고 10여개국 학자들이 역사적 근거를 따져가며 토론을 가진 것이다. 미국과 영국,프랑스와 러시아,한국 중국 이스라엘 슬로베니아 알제리 등의 학자들이 참석한 '제10차 바다 이름에 관한 국제세미나'는 두 나라의 팽팽한 주장을 거듭 확인했지만,지명에 관해 당사국간 분쟁이 빚어지는 경우에는 통일된 명칭이 합의되기 전까지 '병기(倂記)'가 바람직하다는 데 결론이 모아졌다. 한국의 지리·정치·경제학자들이 주축이 된 사단법인 동해연구회가 주최한 이 세미나에 일본인 학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학자 몇 명이 일본쪽의 주장을 정리해 소개했을 뿐이었다. "세계 60개 주요국의 지도 3백92개 가운데 97%가 '일본해'로 단독 표기하고 있는 현실"(2004년 4월 일본 외무성 성명서)에서 굳이 한국쪽의 문제 제기에 말려들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일본이 '동해' 표기문제에 관한 국제적 공론화 확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몇 갈래에 걸쳐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세계 최대 지도제작회사인 영국 브리태니커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최근 두 나라 사이의 바다 이름으로 '일본해'를 단독 표기해온 원칙을 깨고,'동해' 병기원칙을 발표하는 등 한국의 '동해이름 되찾기' 노력이 국제적 반향을 얻어가고 있는데 따른 일본의 위기의식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우선 세계 지리학회와 지명표준화 관련 기구의 위원장급 인사 5명을 비롯 11개국 23명의 중진 학자들이 참석한 이번 세미나를 앞두고 일본측이 은근한 '방해공작'을 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이스라엘 히브루 대학의 원로 지리학자인 나프탈리 카드몬 교수는 자국 주재 일본대사관 관계자로부터 "한국이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해 한국쪽 주장에 동조하는 활동을 한다면 일본과 이스라엘의 우호관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충고'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유엔 지명표준화위원회 전문가그룹 부의장을 맡고 있는 알제리의 브라힘 아투이 박사도 비슷한 얘기를 일본측으로부터 들었다고 했고,러시아과학원의 세르게이 간제이 극동·태평양지리연구소 부소장은 "앞으로는 한국이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그렇게만 알아달라"고 세미나 주최측에 밝히기도 했다. 일본은 왜 국제세미나에 직접 참석해 '일본해'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주장하지 않고,오히려 제3국 전문가들까지 토론무대에서 끌어내리려는 전략을 펴는 것일까. 이번 세미나에서는 그 속내를 짐작케 할 만한 중요한 사실이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세계 해양명칭을 표준화해 각국 지도제작자들에게 따르도록 하는 세계수로기구(IHO)가 지난 1929년 회의에서 한·일 사이의 바다이름을 '일본해'로 단일화하기로 의결한 뒤 아직껏 그 결정이 유지되고 있다는 대목이다. 1929년이라면,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존재하지 못했던 때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이 두 나라의 유일한 대표로 참석한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된 지명을 아직껏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약소국'의 비애를 새기고만 있어야 할까. 친일 청산도 좋지만,'동해 회복'은 그보다 훨씬 더 시급한 전국민적 일제잔재 극복의 과제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문제 해결의 우선순위조차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학영 경제부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