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한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이면 문짝을 모두 들어내 마당에 놓고 물로 적신다.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손가락 구멍이 난 창호지를 떼어낸 다음 깨끗하게 닦아 그늘에 말린다. 하얗고 말간 새 창호지를 바르면서 사이사이 예쁘게 말린 코스모스나 단풍잎 은행잎을 넣는다. 방문과 창문이 모두 한지로 된 한옥에 살던 사람들은 가을이면 이렇게 문종이를 개비하곤 했다. 한지문은 신기해서 빛과 공기는 통과시키지만 물체의 형태는 보여주지 않고 바람도 잘 막는다. 햇살이 방안 가득 쏟아져도 안팎은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고 문틀만 휘어져 있지 않으면 한겨울 삭풍도 문밖에서 돌아선다. 한지의 재료는 뽕나무과의 낙엽성 관목인 닥나무(楮木).가지를 삶아 껍질을 벗겨 말린 뒤 물에 불려 두들겨 속껍질과 겉껍질로 나눈 다음,속껍질에 잿물을 넣고 3시간 이상 뒀다 압축기로 물을 짜내 끈적끈적한 닥풀뿌리 물에 풀었다 발에 떠 말리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지(닥종이)는 질기고 단단해 오래도록 변하거나 삭지 않는다. '종이는 천년 비단은 오백(紙千年絹五百)'이란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원료에 따라 창호지 태지(편지지 봉투) 화선지 장판지 포장지 미농지 피지,종이 질에 따라 백면지 별백지 상지 열품백지 은면지 죽청지 등으로 나뉘고 산지별 이름도 다양하다. 글씨 쓰고 그림 그리고 책 만드는 데는 물론 문종이 장판지 등 안쓰이는 곳이 없던 한지지만 근래엔 화선지와 공예품용 외엔 거의 없을 만큼 축소됐다. 그러나 한지의 경우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데다 태양 흑점으로 인한 전파장애를 막는 등 성능이 뛰어나 기존 용도와 다른 첨단제품용으로 개발된다고 한다. 오토바이 헬멧은 물론 차세대 반도체 및 자동차 에어백,우주선 보호장비와 종이로봇까지 개발된다는 것이다. 민·관이 힘을 합쳐 스러져가던 한지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나섰다는 소식이다. 정부 지원 아래 한지 생산자와 공예가,학자 등이 한지산업기술발전진흥회를 발족시키고,한지의 KS규격 제정 등 한지산업 표준화와 해외 기술교류에 힘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 것의 탁월함을 제대로 발견,발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