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다시 월드컵을 회상하며

본래 우리에겐 누구 못지 않게 확고한 국가관이란 게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나 하나쯤 희생할 수도 있다는 기본인식,그런 거룩한 정신들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때는 나라를 잃어본 사람들,전쟁에서 피를 흘려본 사람들,가난과 허기를 몰아내려고 산업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이들이 세상을 주도하던 시절이었다. 예컨대 제철소 같은 데선 박봉에 낡은 군화와 헤진 작업복 차림으로 근무해도 자신들이 만든 쇠가 세계에서 가장 값싼 원자재가 되어 수출보국에 이바지한다는 사실 하나로 남다른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와 같은 시대정신은 차츰 사그라졌다. 위정자들이 국민의 건강하고 투철한 국가관을 하도 많이 이용해먹은게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아무 데나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고,수많은 이의 인권을 짓밟고,집권에 반대하면 무조건 빨갱이나 죄인으로 내몰아서 배신자 매국노로 만들었으니 그 부작용 반작용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의 키워드는 민주였다. 국가와 민족이란 간판이 민주로 바뀌었지만 뜻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사와 열사,피끓는 학도들이 민주를 부르짖으며 쓰러져갔다. 그들의 희생을 애도하는 자리에 태극기가 나부끼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군중들은 이내 한덩어리로 어울렸다. 최루탄 지랄탄이 난무하던 독재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 무서운 힘이 마침내 이 땅에 민주시대를 활짝 열어놓았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엔 정치집단의 전리품으로 퇴색되고 말았다. 저들의 추악한 집권욕이 이번에도 국민의 뜨거운 열망과 거룩한 애국심을 여지없이 이용하고 유린했다. 민중은 순수한 민주주의를 원했을 뿐인데 정치인들은 서로 자신들의 집권을 지지한 행동이었다며 우겼다. 이후 양 김이 차례로 집권하면서 한국사회는 최소한의 도덕심마저 상실했다. 독재와 민주의 구분이 모호해진 것은 물론 심지어 사안에 따라선 독재자가 더 낫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설득력을 얻도록 만들어버렸다. 필경은 그래서일 것이다. 이젠 아무도 국가와 민족을 말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그렇게 말하는 자체를 거부하고 혐오한다.애국 운운하면 눈총을 받기 일쑤다. 애국심을 내세우면 문화상품도 잘 팔리지 않아서 테마를 비틀거나 은유법을 쓴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 같은 영화가 그 대표적인 예다. 성조기가 펄럭이고도 성공하는 미국영화에 견주어보면 사정은 더욱 심란해진다. 국가관이 무너지고 애국심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나라와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 고금의 역사에 그러고도 망하지 않은 사례는 없다. 지금 우리사회가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점은 그것이다. 해마다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이민 희망자의 조사통계를 봐도 그 수준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국가관이 와해되고 애국심이 사라진 것같은 지금에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지난 월드컵에서 보여준 그 뜨겁고 생생한 열기,세대와 신분을 초월한 단합과 열정,방방곡곡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우리 겨레만의 저력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란 사실이다. 비록 국가와 민족이란 구호는 아니지만 애국심은 살아있고,겉으로 애국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조금도 변질되지 않았다. 60~70년대에 산업을 일으키고 80년대엔 기어코 민주시대를 열었던 애국의 원형질,누가 불을 지피기만 하면 그대로 화산처럼 폭발할 민족의 생동하는 에너지를 우리는 2002년의 월드컵 열기 속에서 명백히 확인한 바 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그 저력을 되살리느냐에 있다. 그것 없이는 지금의 극심한 침체와 살인적인 불황을 이겨내기 어렵지 싶다. 우리는 다시한번 뜨겁게 미쳐야한다. 그것만이 우리 겨레가 번영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누구라도 좋고 무엇이라도 무방하다. 우리를 또 한번 미치게 달굴 테마와 슬로건을 새해엔 기필코 찾아내달라. 늘 정쟁만 일삼는 한심한 세태를 보면 소용없는 주문일지 모르지만,이것이 바로 우리사회의 지도층이 고민하고 풀어야할 시대적 사명이 아닌가 한다.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