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할 때다] <4> 은행 '무사안일'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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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 단기부동자금이 4백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 25억원 이상인 기업들의 현금보유액은 지난해 70조원에 달해 3년전인 2001년(32조6천억원)의 두 배가 넘는다.
시중엔 자금이 이토록 넘쳐나지만 정작 중소기업들에겐 돈이 가지 않고 있다.
신규대출은 고사하고 과거에 빌린 대출금을 갚으라는 성화에 부도 걱정만 늘어날 뿐이다.
우리경제에 "돈맥경화" 현상이 고착화하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리스크기피가 문제
돈맥경화 현상의 핵심고리는 은행이다.
은행들이 외환위기 이후 '수익성'을 지상의 경영목표로 삼기 시작하면서 경제 흐름에 '혈전(血栓)'이 되고 있는 것.
올 상반기 은행권의 중소기업 신규 대출액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58.2%나 감소했고 일부 업종에 대해서는 대출금 회수도 이뤄지고 있다.
은행들의 여신회수는 '비올때 우산 빼앗기' 식으로 진행된다.
모텔업이 불황을 맞으면 어김없이 숙박업 대출을 감축하고,조류독감으로 닭고기가 팔리지 않으면 여지없이 닭가공업체로 달려가 남은 돈을 빼앗아간다.
물론 은행들의 리스크 관리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은행들이 '옥석 가리기'를 제대로 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신용위험 평가를 통해 한계기업을 도태시키고 성장 가능성 있는 기업을 효율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경제체질 개선에 오히려 약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술력과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들도 도매금으로 대출회수 요구를 받고 있고 신규대출은 요원하기만 하다.
금융계 관계자는 은행들의 리스크 관리가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수치만을 근거로,탁상심사에 그치고 있다면서 "은행들이 '모델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대로 된 재무제표가 있을리 만무한 중소기업에 재무적 잣대를 가장 중요하게 삼은 평가모델을 들이대니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또 현장에 직접 찾아가 경영자를 만나보는 등 발품을 팔아야 하지만 지금의 은행 심사인력으로는 엄두도 못낸다고 그는 설명했다.
◆은행들도 할 말이 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중소기업 자금지원은 공공부문에서 담당할 몫이지 상업금융회사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며 "은행을 자금배분 수단으로만 활용하려 하면 또 다른 공적자금을 잉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외환위기 이전 국내 은행권은 한계기업들에 특혜성 저리자금을 찔러넣어주는 정책수단일 뿐이었고 그 결과는 금융시스템 붕괴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다른 관계자는 "은행을 상업금융회사로 인정한다면 채무상환능력이 떨어지고 사업전망이 불투명한 중소기업에 무턱대고 자금을 지원하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며 "신용위험이 높은 중소·영세기업의 자금난은 정책금융회사가 신용보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관행 개선이 필요
신용위험 평가 전문가들은 은행원들이 소신있게 대출할 수 있는 제도적 문화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고의성 없는 부실대출의 경우 대출담당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기로 한 것은 그런 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면 효과가 없다는 게 일선 직원들의 지적이다.
개별 은행들의 내부 규정이 바뀌고 실제로 인사고과때 그런 원칙이 작동해야만 은행원들이 움직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감독당국의 정책도 바뀌어야 한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정부당국은 그동안 은행산업의 구조조정과 건전성 제고에 주력한 나머지 금융중개기능 강화에는 소홀했다"며 "은행산업에 대한 정부당국의 인식전환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책은행을 기업금융 특화은행으로 육성하고 △매각이 예정돼 있는 금융회사는 금융중개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국내외 자본에 충분한 시간여유를 갖고 매각하며 △국제업무 비중이 낮은 은행에 대해서는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신축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신용보증기금 등 국책 보증기관들의 보증여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도 주목된다.
박재하 금융연구원 거시금융팀장은 "은행과 신용보증기관,대출자 모두가 위험을 골고루 부담하는 게 중요하다"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되지만 우선은 신용보증기관의 보증을 확대하는 게 단기대책으로 활용할 만하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은행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은행들과 신뢰관계를 쌓는데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은행과의 약속은 어떤 경우에든 지키고,은행이 재무제표를 중시하면 자발적으로 외부감사를 받는 등 믿음을 줄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