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연기금 의결권 정치적 독립

조명현 최근 기업의 의결권과 관련된 두가지 중요한 법적 제도적 환경의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대기업그룹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단계적으로 축소,제한하는 공정거래법의 개정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섀도 보팅(shadow voting)의 관행을 따라왔던 연기금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는 국민연금법 기금관리기본법 등의 개정이다. 이 두 가지 변화는 우리기업의 소유 및 지배구조를 상당히 변화시킬 것이며 나아가 기업의 경쟁력과 주주가치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재벌그룹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의 득실은 예측하기 힘들어 보인다.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는 당장 경영권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질 것이다.SK㈜의 사례와 외국의 실증연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적당한 경영권 탈취위협은 기업가치와 경쟁력을 높여준다. 하지만 외국에 비해 경영권에 집착하는 한국 기업문화 특성을 고려할 때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는 재벌기업들로 하여금 외국기업에선 찾기 힘든 수준의 심리적 금전적 경영권 방어 비용을 유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쪽 모두 망한 신동방의 미도파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는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높은 경영권 방어비용은 기업의 경쟁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또한 '양면의 칼'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수 있다. 연기금이 의결권을 갖는 것은 주식소유자가 의결권을 갖듯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의 가치 제고를 위해 연기금이 의결권을 적극 행사하는 건 바람직하다. 특히 기업지배구조 측면에서 연기금의 의결권행사는 기관투자가로서의 발언권을 강화함으로써 지배주주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로 사용될수도 있으며 이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고 있다.즉 경제논리로만 본다면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는 기업가치 제고에 도움이 될수 있을 것이고 연기금의 자산가치를 높여 국민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에 '정치'가 개입되면 또다른 얘기가 될수 있다.연기금이 여러 경로로 정부와 여권의 영향하에 놓여있다는건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연기금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건 여권이 마음만 먹으면 연기금을 통해 민간 기업분야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경영진과 이사진의 임면에 여러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할 소지가 다분하다.또한 정부나 여권이 재벌정책수단으로 연기금 의결권을 사용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적 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연기금 의결권이 이용된다면 의결권 행사는 해당기업의 가치와 경쟁력 하락으로 직결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연기금 가입자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약 연기금 의결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될 여지를 남겨둔 채 연기금 의결권이 허용된다면 재벌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려는 명분은 설 자리가 없다. 재벌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축소하는 이유는 재벌계열 금융회사들이 자신들에게 돈을 맡긴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영권 보호와 같은 재벌그룹의 이익을 위해 의결권 행사를 막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연기금이 연기금 가입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할 여지가 있다면 이를 허용해선 안될 것이다. 따라서 연기금 의결권 도입을 위해선 연기금 자체의 '정치적 독립'이 전제돼야 한다. 비록 '기금운영위원회'가 설치돼 여기서 의결권 행사기준을 정하고 국민연금의 경우 보건복지부 장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의해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하지만 그 규정의 모호성으로 인해 연기금의결권의 정치적 이용 문제가 발생할 소지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정부는 정부지배구조 개혁의 일환으로 연기금의 독립을 제도화 할 필요가 있다. 기업지배구조와 경쟁력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새로운 의결권 관련 제도의 도입은 새 제도가 어떻게 인식되고 운영되는가에 따라 우리 기업과 경제에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