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시원한 말의 허실(虛實)

金秉柱 어느 입심 좋은 사람이 요즘 만든 말이 생각난다. 천당과 지옥 문 앞에서 외국인들은 곧장 입장되는데 한국사람들만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살아서 빨리빨리 근성에 젖은 한국인들인지라 죽어서도 항의 데모를 했단다. 염라대왕 말씀이 한국인은 살아서 뜨거운 찜질방에서 "시원해"하고 탄성을 올리는 버릇을 봐서 한국인 전용 고온도 불가마를 특별 주문제작 중이라는 우스갯소리다. 요즘 자칫 불경죄로 몰릴까봐 천당얘기는 삼가기로 한다. 이처럼 우리말은 쓰임새가 다양해서 오해를 살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다. 시원하고 개운한 기분은 누구나 갈망한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모두 제각기 마음대로 말을 내뱉고 살면 세상이 오죽 시끄러울까. 문명사회에서 사람이 남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고 오순도순 살아가려면 모두 제각기 속시원하게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할 규율과 질서의 틀을 존중해야 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나라마다 자기 나라 이해관계만 주장하다 보면 전쟁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익혀야 할 첫번째 과제는 "인간은 평등하고,세상은 공평하다"는 말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규범적 명제이지 사실적 명제가 아니다. 실제는 사람은 똑같지(평등하지) 않고,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격차를 줄이려고 부단한 자기개발의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평등'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지 선천적으로 주어진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 사회나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이끌게 마련이다. 이들이 다수국민의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지지를 얻어 나름대로 국가발전의 비전을 실현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을 때 나라가 융성한다. 권좌에 오래 머물러 나태해지고 타락에 빠질 때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밀어내는 엘리트의 교체가 일어나면서 사회가 발전한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환란 부정 부패 등의 잘못으로 국민의 지지를 상실한 낡은 정치세력을 물리치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들이 정치권뿐만 아니라 기업계 전문직 학계 등 비정치권까지 투쟁의 대상으로 삼는 데 있다. 물론 과거의 정경유착 등이 빌미를 주기도 했지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핵심가치까지 훼손되는 위험스러운 일마저 국민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정치인은 '국민' 또는 '시민'을 향해 과거 그들을 억압·착취하던 기득권 세력을 단죄하겠다는 시원한 말로 대중인기를 몰아 표밭을 일군다. 기업 특히 대기업은 도둑 소굴이고 전문직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지탄된다. 대외적으로 강대국인 미국에 대해서도 오래 참았던 말을 토로한다. 이것 역시 일부 '국민'에게는 시원하고 개운한 감흥을 일으킬 수 있다. 포퓰리즘이란 '국민'의 이름으로 소수의 기득권 계층에 맞서는,일견 정의로운 자세를 말한다. 전통적인 민주주의와 달리 포퓰리즘은 대내적으로 만만한 적을 만들어 몰아내치며 경박한 국민정서에 영합하는 슬로건을 내건다. 단기간의 '성공'이 부작용의 긴 꼬리로 마무리된다. 대외적으로는 실력에 넘치는 일에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실익을 잃어버리는 길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정부는 예산의 제약을 무시한채 사업을 벌이고, 재정적자를 키우는 것이 특색이다. 현재 정부의 중점사업들의 비용-편익 분석이 주먹구구식이다. 안보 외교도 그러하다. '자주국방',그것은 듣기에 으쓱해지는 말이다. 작은 한국이 큰 미국을 이용하기보다 맞상대하겠다는 것이 진정 가상한 용기인가? 왜 일본은 그리 못하나? 한국이 북한·일본·중국·러시아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뻔한 주적관계를 없는 것으로 눈가림하고 한·미동맹관계를 약화시키면서 주권을 지켜낼 수 있을까? 꿈틀거리는 군국주의 일본의 '버릇고치기'할 만한 국력을 갖추었는가?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은 입이 무거운 법이다. 집에서도 가장은 할 말이 있어도 가슴에 묻고 산다. 지도자는 때론 말보다 침묵의 가치를 음미해야 한다.